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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여행기

1975-7-14 (6)

by 늘 편한 자리 2014. 3. 30.

 

여수에 와서불과 몇시간이었지만 참 볼것이 없는 동네였다.

서울하고 비교한건 아니지만 그래도 여수라는 이름이 이렇게 초라한 곳이었나 싶을정도로 다른게 없었다.

로타리라는 정류장은 이름이 로타리인지 따로 이름이 있는지는 몰라도 시컴한 블럭으로 화단하나 만들어져 있었다.

선창가로 들어가니 골목같이 방파제를 쌓고 수많은 사람이 장사도 하고 구경도 한다.

그곳을 들어간다는게 비비고 들어간다는 말이 맞을정도로 사람은 많고 비 좁았다.

매표소를 찾아 물어보니 충무로가는 배는 오늘 없다한다.태풍주의보가 내려 배가 출발을 못한다는거다.

그러면서 오후 2시30분에 남해행 배가 있으니 그것을 타고 남해로 가서 자기들,선원들 숙소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충무로 가란다.

불편해도 여행을 할때 누구나 고생을 한다며 함께 자고 가라고 한다.

나이가 23-24세 되어보이는 청년하고 40대쯤 되는 아저씨가 자고 가라고 하는데 선듯 대답이 안나왔다.

무주에서 나올때 타고왔던 버스 기사도 그렇게 말을 했는데 여기서 또 그런말을 듣는다.

고마운 생각이 들어 한참을 같이 이야기하다 시내나 한바퀴돌고 오겠다고 하고 헤어졌다.

매표소에서 서성일때 서울에서 온 남녀를 만났다.

그네들도 무주로해서 남해 상지해수욕장을 간다고 했다.

무주에서 일주일있다가 내려와 다시 남해로 간다는 말을 들었을때 내가 너무 서두는것 같았다.

하룻밤도 안자고 달려와서 그런지 그다지 기억에 남는것도 없는데 이곳에서도 도착하자 마자 가는것 부터 알아 보고 있다.

같이 다니는 사람을 보니 혼자라서 좋은점은 출발에 전혀 걸릴게 없는거지만 같이 다닌다는 말에 부럽기도 했다. 

버스를 타고 오동도를 갔다,아침부터 흐린날씨가 결국은 쏱아 붓고 만다.

제발 비는 오지 말라 했는데도 버스를 타자 바로 내리기 시작해 버스안에서 판쵸를 꺼내 입고 오동도 종점에서 내렸다.

약 300미터정도(?) 보이는 다리가 길게 반쪼각섬인 오동도까지 길게 나 있었다.

파도가 넘실데고 바람은 비와 함께 날려버릴듯이 덤볐다.

다리입구에서 입장권을 팔고있어 50원을 주고 표를 끊었지만 이런곳도 돈을 받는다.

바람은 더 세지고 비는 앞을 가릴 정도로 왔다.

하늘하고 바다가 맞닿고 뿌연 연기로 온통 다 가려버리는것 같은 음침한 느낌까지 주었다.

조금가니까 해녀들이 빗속에서 건져낸 해물을 팔고 있었다.

신기하긴 했지만 비때문에 잠시도 서 있을수가 없었다.

종이장 같은 판쵸는 비막이가 아니고 바람에 펄력여 그져 바람따라 소리만 낸다.

한참을 가는데 평생동안 못잊을 우연이 또 생겼다.

준기아저씨를 다리위에서 비가 내리는데 만난거다.

너무 반갑고 기가 막혔다.서울에서 보고 한참이 지났는데 천리먼곳에서 비오는 날 다리위에서 만난거다.

미리 이야기지만 아저씨는 간경화를 앓고 있어 나를 만나고 몇달후에 세상을 떴다.겨우 40을 넘겼는데.

아무도 안 만날려고 여수 처가에 와서 은둔을 하고 있었는데 나를 우연히 마지막으로 본거다.

아저씨를 다시 돌려 오동도로 들어갔다.

술집에 자리잡고 앉아 비오는 바다를 보고 있으려니 술을 한잔도 못하는 나도 참 좋구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데 역시 우연이란게 참 재미있는거라고 했던것 같다.

항상 웃는 얼굴로 유모를 간직하고 집안의 불행도 잊어버린듯이 사셨던 분이었다.

광주에 살때  아버지하고 술친구를 하시던 분이라 가끔 뵜었다.

준기아저씨 아주 친한 친구분이 충장로하고 금남로사이에 송남여관을 하셨는데 성씨가 백씨였다.

아버지보다는 년하들이었지만 형님동생하면서 자주 어울리시는것 같았다.

그러다 한분한분  이사가고 가끔 한번씩 만나시면 통금까지 술을드시고 여관으로 다 같이 가서 주무시고 

아침이면 속이 쓰리다고 해서 해장국까지 사다 드린 기억 있지만 지금은 다 저 먼 곳으로 가셨는데 지금도 만나고 계시는지.

어저씨하고 의논끝에 엔젤호는 떠날것이라고 해서 엔젤호 정박소로 갔다,

온몸은 비에 다 졎고 걷기도 힘드는데 엔젤호도 떠날것 같지가 않아 또 머리를 쓴다는게 

역으로 가서 진주까지 가는 기차를 타기로 했다.

그곳에서 버스로 충무에 들어갈려고 생각했다.

젖은 배낭은 천근만근이었지만 아저씨가 동행해주셨다.

마침 서울행 특급열차가 있어 순천까지 표를 끊었다.

완행보다는 다섯배가 비쌌지만 가고 싶은 마음에 어쩔수 없었다.

아저씨를 만나고 불과 한두시간이었지만 이곳저곳 같이 다녔다.

뭐가 그렇게 나를 끌고 갔는지 그때는 몰랐지만 여수에서 하룻밤 자고 출발했어도 됐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하니 내 인생에 우연중에 가장 큰 우연을 여행 마지막에 만들려고 그랬던것 같다.

헤어지긴 섭섭해도 시간이 되고 기차가 들어오니까 뭔가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나중에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그날 비를 너무 많이 맞은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너무나 젊은 나이였지만 좋으신 분이라 분명 좋은데 가셨을거라고 믿는다.

급행열차를 타고 보니 객차엔 나밖에 없었다.

싸게 하고 사람이나 많이 태우지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도 없는 기차간에서 젖은옷을 벋고 군복바지로 갈아 입었다.

혹시 몰라 가져온 옷인데 갈아입고 보니 이젠 정말로 거지가 돼 버렸다.

 

순천역은 다른곳,특히 여수역하고는 비교가 안될만큼 깨끗했다.

남쪽의 기차들이 연결되는곳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역앞에서 길다랗게 뻗은 도로가 포장도 깨끗이 잘 되어있고

신흥도시에 온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비가 완전히 그치고 해가 나기 시작했다.

여수에서 그냥 있을것하는 후회가 또 들었지만 어쩌겠는가.

점심때가 지나 나중에 다시 기차를 타야 하니까 우선 배라도 채우자고 역앞에 있는 중국집으로 들어갔다.

주인인듯한 사람이 가게 안쪽에 있는 방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다가 내가 들어가니까 나와서 주문을 받고 음식도 만들었다.

그런데 가져다 준 짜장면은 젓가락을 던져 버리고 싶을 만큼 맛이 없었다. 아니 맛이 더러웠다.

표현이 없어서 더럽다고 하지만 맛이 짜장이 아니라 된장을 썩어 만든것같은 맛이 났다.

일기에는 된장하고 구정물은 썩어 만든것 같다고 썼는데 그렇지는 않았을거다.

나에게 음식을 주고 남은건 자기가 들고 방에 앉아 먹었다.

먹으면서 나를 흘금거리면서 하는말이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짜장면 어디있어 하는데 그냥 나오기도 그렇고

40원이나 줬는데 돈도 아깝고 해서 몇젓가락을 뜨는데 속이 뒤집어질것 같았다.

그날 이후로 시골에 가거나 변두리에 있는 중국집에 가면 절대 짜장면은 안시키는 버릇이 생겼다.

아직도 그때 그맛이 입가를 맴돈다.짜장면 ,된장면,구정면...

내가 남기고 나오니까,사실 거의 다 남겼다.

주인이 그릇을 보더니 말은 안해도 표정이 욕이 입가에서 맴돈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나는 나데로 재수없다고 나와 버렸지만 주인은 주인데로 재수없는게 들어와서 하곤 욕했을거다.

시간이 남어 바로 같은건물 이층에 있는 다방엘 들어갔다.

손님이 사오명정도 있었는데 내 모습을 보더니 별로 달가워 하질 않는것 같았다.

다방에서 커피를 시켰더니 커피에 파리가 죽어 있었다.

어떻게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한시간정도 있다가 나왔다.

2시30분에 진주행 기차가 들어와 탔는데 3등열차였다.

열차의자는 조금전에 텄던 서울행 특급하고는 달리 완전고물이고 일제시대부터 쓰던 의자 같았다.

한쪽에서는 젊은 사람들이 모여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서울에서 출발할때 보려고 들고온 포켓판 부리바를 거내 들고 읽으려 했는데 한장도 못 넘기고 잠이 들어버렸다.

세시간쯤 잠이 든것 같았는데 눈을 뜨니 또 비가 내리고 있었다.

6시가 넘어 진주에 도착했다.

진주에서 내려 충무로 가는 버스를 물어보니 6시50분에 직행이 있단다.

역앞 로타리같은곳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진주는 다른곳하고 조금 다른점이 있었다.

역앞으로 쭉 뻗은 도로는 집들이 별로 없었다.

다른곳하고는 달리 상점들은 없고 관공서 같은 건물이 드문드문보였다.

허허벌판에 집이 몇채있는것 같이 보였다.

버스를 기달리면서 옆에있는 학생에게 촉석루가 어디있냐고 물어봤다.

그런데 기가 막힌게 촉석루가 뭐냐고 나에게 묻는다.

고등학생정도는 되어 보였는데 촉석루를 몰랐다.

그래서 진주에서 안사냐고 물었더니 태어나서 쭉 살고있다고 한다. 할말이 없었다.

진주사람이 촉석루를 모른다면 논개가 얼마나 서러울까.

잠시후에 버스가 왔다.버스는 완전 만원,서울의 아침 출근버스보다 더 했다.

비비고 들어가 자리를 잡고 섰는데 차장아가씨가 나에게 앉으라고 자리를 만들어 줬다.

아마 내 모습이 무지 피곤하게 보였던가 어떻게 혼자 여행을 하는냐고 물어봤다.

특별한건 없고 그럴수도 있지 않냐고 했더니 남자차장이 자기 경험담을 이야기 하면서 

도움을 줄려고 하는것 같았다.

진주를 벗어나 비포장을 달리니까 속이 완전 뒤집어져 버렸다.

어느 정류장에 서자 바로 다 토해버렸다.속은 뒤집어 지고 몸은 천근만근 무너져 내렸지만 

버스를 타지 않을수는 없어 또 다시 비포장을 달리는데 죽을맛이라는 말이 있을것도 같았다.

버스가 충무에 가까워져가자 시원한 바람하고 바다냄새가 같이 찻속으로 들어왔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보니 어둠속에서 충무시의 야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집식구라고는 다해서 네명이었는데 세명이 한국으로 가버리니 혼자 덜렁 남았다.

왕복으로 8시간정도를 운전해서 공항에 데려다 주고 돌아오는데 그래도 몇일있으면 영주권을 받아 돌아오겠지 하고

당분간 혼자라 편하겠다란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 도착해서 영사관에 가보니 아직 서류가 도착 안했다고 다시 오라 했다해서 불안하기 시작했다.

요즘은 다 컴으로 하니까 하루도 필요없이 바로 바로 되지만 그때는 종이로 우편으로 하니 바로 될리가 없었다.

더우기 외교문서 비슷한것은 행랑으로 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중국변호사에게 갔더니 자기가 잘못했다는 말은 안하고 가족이민초청으로도 한가지 더 신청하란다.

이민국도 가보고 해도 한번 떠난 자리로 돌아온다는건 불가항력이었다.

그리고 돌아온게 다음해 11월이었으니 거의 15개월을 떨어져 있었다.

혼자 있으면서 식구를 데려올려면 직장증명이 있어야한데서 여기저기 취직도 했다.

한달 두달 다녔지만 그때가 1986년이라 한국에서는 매일 데모를 했다.

볼티모어에 한국라디오가 한군데 있었는데 뉴스를 듣느라 뉴스시간만 되면 다 몰려들었던 생각이 난다.

일년여를 혼자서 있으니 돈도 벌리는것도 쉬원찮고 의욕도 없었다.

그러다 식구들이 돌아오고 나서 일년여를 벌었더니 제법 손에 쥐게 됐다.

달라스에서 같은 학교를 다녔던 친구가 월스트릿에 연수를 왔다해서 만나러 갔다 고생길로 빠져 버렸다.

자기가 머무는 집 주인이 식당을 하고 있는데 한달에 만불을 버는 가게를 판다고 한다. 

두말도 않고 내가 하겠다고 해서 샀는데 그게 완전 거짓말이었다.

그 식당을 하는 삼년동안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시작하고 일년도 안돼 나는 따로 장사를 시작했다.

다른데서 돈을 벌어 식당 렌트도 냈는데 나중엔 밑빠진 독에 물붓기였다.

갈수록 장사는 안되고 거기다 LA폭동까지 나니까 온 세상이 다 조용해져 3년 4개월만에 문을 닫아버렸다.

문을 닫을때 집주인 여자가 나한테 패악을 하고 그 딸은 내가 렌트를 안주면 건물을 뺏긴다고 한다.

삼년을 넘게 꼬박꼬박 렌트를 주고 식당 권리금도 15만불을 주고 샀는데 

우리를 자기집 머슴으로 생각했었던것 같다.

내가 나가면 모게지를 못내 집을 뺏긴다니.... 그럼 나는 자기들 집 지켜주는 사람이란 말인가.

하루도 안늦게 한달에 4000불씩을 삼년을 넘게 줬다.

그 권리금 15만불로 건물을 샀으면 ,,,얼마전에 뉴욕시내에 주유소가 팔렸는데

40년전에 10만불을 주고 산게 4000만불에 파렸다고 뉴스에 나왔다.

지금으로 치면 1억주고 사서 400억에 판거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돈을 주고 자기한테 산 가게를 포기한다면 미안해 하지는 않아도 패악질은 말아야지.

우리 생활은 완전히 노예나 돈 벌어주는 기계나 마찬가지고.....    

우리 생활이 없었다.

새벽 5시30분에 문열고 저녁 7시에 닫는데 정말 한심한 일이었다.

차라리 남의 집에 취직을 하면 하루라도 놀고 돈도 벌었을건데.

그렇게 버텨 줬는데도 나에게 패악질을 하니 마귀가 따로 없었다.

내가 처음에 자기들에게 권리주고 샀던 그데로 다 주고 왔는데도 나중에 나를 고소했다.

계약기간이 6년 반이 남았으니 그 날자데로 렌트를 다 물어내라는거다.

결국 재판을하고 10만불을 내라고 판결이 나와 파산으로 정리해버렸다.

인생이 황금기라는 30대 중반을 거기서 썩은게 정말 억울했다.

그러나 항상 반전은 있기 마련이고 노력하면 얻을수 있다고 식당을 하면서 따로 했던 장사가 잘돼서

오히려 처음 식당 했을때보다 훨 여유가 있는 생활을 할수가 있었다.

아이들도 커서 중학을 가니 이제 마음놓고 우리만 다닐수도 있게돼고,.

전에 북경올림픽을 하는데 태권도 시상식에 식당주인 아들이 나와서 시상하는데 옆에 

서있는걸 보고 욕찌기가 나왔다.그 아들이 여기서 태권도 도장을 한다.

나에게만 그런게 아니고 그 식구들에게 걸린 모든 사람들이 다 나 같은 경우를 당했다고 들었다. 

사람이 베풀지를 않으면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해도 누가 좋아 하겠나.

부모하고 똑 같다는 말을 듣고 그렇겠지 했다.

그리고 몇년 장사도 하고 애들 옷도 만들어 파는데 너무 잘되니까 사람들에게 나는 앞으로 5년 ,50살만 되면 

은퇴하고 번돈만 쓰고 살아도 된다고  은근히 사람들한테 자랑을 했다.

우리 일을 가져다 집에서 하던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그 사람 남편이 나에게 이상한 부탁을 했다.

불법적인 일이라 들어주기가 곤란한 부탁이었는데 내가 안한다고 하니까  경찰에 나를 신고했던것 같다.

물론 그 사람이 그랬을거라고는 추측이지만 많은 부분이 나중에 생각해보니 의심이 갈만 했다.

화요일 아침 10시에 경찰이 공장에 찾아왔는데 사복입은 사람들이 20여명이 따라 들어왔다.

들어오면서 재봉틀 코드부터 뺐다.

아마 가짜를 만든다고 신고를 했는것 같은데 우리공장은 애기들,아주 작은 네살정도까지만 만들었다.

가짜가 어디있는지 찾고 난리가 났는데 얼마전에 손님이 양키그림을 그려달라해서 만들어줬는데 

그것 몇장을 보더니 나를 데리고 나가고 공장을 다 털어갔다.

다음날 신문을 보니까 옷만 63000 장, 천 하고 공장에 있던 기계전부 .사무실에 있는 돈까지 다 가져 버렸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니 걱정말고 내일부터 다시 공장을 돌려도 된다고 했는데 

돌아와보니 다 가져버리고 자기들이 먹고 버린 피자 박스만 몇개 있었다.

재판을 했는데 벌금을 주는데 150불이라고 했다,

그것도 나를 체포할때 주머니에 있던 돈을 빼니까 50여불 내고 끝났다.

돈 150불 벌금 때리고 물건은 50만불 이상을 가져가 버렸다.

조건은 뺏어간 물건에 대해 고소를 안하는 조건이었으니

미국이 민주주의 국가이고 경찰국가이고....웃기는거다.

결국은 내가 동양사람이라 우습게 보고 당한거다.

신문에 난 걸로는 50만불을 뺏았갔다고 했다.

변호사가 하는 말이 내가 백인이거나 유태인이었으면 절대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고 하니 할말이 없었다.

그때부터 항상 하는 말이 내 평생 제일 못한일이 미국에 온거라고....

그런 일이 있고 나니까 물건 사러 오는 사람이 없어 물건 뺏긴것 보다 더 큰 문제였다. 

그 다음날 부터 새로 재봉틀도 사고 천도 사고 일하는 사람들도 다 다시 나오고해서 공장을 돌렸는데

소문을 듣고 손님이 한명도 안오는거다.

그때 90년대 말이라 한국 아파트가 하루가 다르게 오른다 해서 서울에 아파트를 두채나 사놨는데

공장에서 뺏어간 천 값을 갚을려고 아파트 두채를 다 팔아와 천공장에는 뺐겼다는 말을 한마디도 안하고 다 갚아줬다.

사실 내가 천을 다 뺐겼기에 내가 안 갚으면 경찰서로 찾아가고 그랬으면 천은 돌려 받았을지도 모른다.

말을 하기가 싫었다. 화도 났지만 구차하게 말을 하기 싫어 아무 말도 안하고 아파트 두채값을 줬다.

그 사람들은 나를 보고 외상으로 공장에서 만들어 준건데 머라 하겠나.

더우기 그때는 IMF가 난지 얼마 되지 않아 아파트도 산 값보다 훨씬 싸게 팔아 버렸다.

다행히 여기에 사논 집은 나중에 그 집으로 큰 돈을 벌었다.

은퇴는 없었던 일이 되고 지금까지 일한다.ㅋㅋㅋㅋ

힘들지 않게...

놀때는 놀고....

여기선 많이 벌면 많이 뻿긴다는걸 사람들이 여러번 이야기 해줬는데 확실히 몸소 체험을 했다.        

 

버스는 어둠속을 뚫고 달리는데

충무의 야경이 보일정도 돼서야 길은 포장이 되어 있었다.

한두군데 정류장에 섰다가 가는데 어둠속에서도 차장밖으로 바닷가가 보였다.

충무로 향하는 버스에 오를때부터 이상하게 생각했던건 왜 충무에는 기차가 없냐 였다.

도시에 철길이 없다는게 사는 사람들에게 불편할건데 모르고 사는건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버스가 종점에 다다르니 차에서 호의를 배풀어주던 차장들하고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시내버스로 갈아타고 몇정류장 가지 않았는데  이곳이 시내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 내렸다,

내리고 보니 중심가에 와 있는것 같았다.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그져 조용하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몇군데 상점들도 지나면서 들여다 봤지만 별로 특이한건 없었다,

이틀이나 제데로 자지를 못하고 무거운 배낭에 덜덜거리는 차를 왔으니 다리는 다 풀리고 어디든 누울곳을 찾고 싶었다.

바닷가에 왔다고 파도소리도 듣고 싶었지만 우선은 잠자리가 급했다.

걸으면서 어디로 들어갈까를 찾아봤는데 비탈길을 오르니 가정집처럼 생긴 여인숙간판이 보였다.

주인 할머니는 몸이 비대했는데 반겨 맞아주고 방을 내줬다.

한평이나 되나 싶은 방에들어가 젖은 물건들을 다 꺼내놓고 보니 다른건 그래도 괜찮은데 지도하고 책이 다 젖어 있었다.

찢어지지않게 잘 펴논다음 두다리와 두팔을 펴봤다.

혹시 자다가 닿아서 찢어질까 걱정이 됐는데 손밖으로 벗어난것 같아 괜찮구나 싶었는데 그데로 잠이들고 말았다.

얼마나 잤는지 눈을 뜨고 시계를 보니 9시가 넘었다.11시간을 눈도 한번 안뜨고 자버렸다.

대충정리를 하고 나오니까 아침햇살이 너무 따뜻했다.

밤에는 모르고 그져 터벅거리면서 올라왔던 곳이지만 아침에 나와보니 담아래로 선창가가 보이고

거제도가 왼편에 오른쪽으로 보이는 작은 섬들은 한려수도의 끝인것 같았다.

저 섬들을 지나지 못하고 어떻게 남해를 여행했다고 할수 있을까는 생각까지 들었다.

주인할머니가 거제도 성포로 가는배가 있다고 했다.

다른곳은 못가봤지만 충무앞바다라도 배를 타고 지나고 싶었다.

우선 남망산에 올라 잠깐이라도 충무를 보고 떠나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선창가로 나오니 지척에 있는 남망산공원까지 나룻배가 다녔다.

사공이 노를 젓는데 뱃삯이 10원이었다.

어릴적 목포에 살때 아버지따라 삼학도로 해수욕을 갈려면 선창가에서 나룻배를 타고 삼학도로 갔다.

그때도 배를 타고 잠깐 건너는 바다였지만 그 냄새는 똑 같았다.

약간 시큼한 바다냄새.선창가에서 나는 묘한 쓰레기냄새 같으면서도 퀴퀴한 냄새하고 썩인 묘한 냄새였다.

공원에 오르니 충무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공원위에는 충무공동상이 바다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곳에서도 동상을 많이 봤지만 이곳 총무공 동상은 제자리에 서 있는것 같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곳에는 시인 유치환의 깃발이 돌에 세겨져 있었다.

내려오면서 충무오광대라는 간판을 보고 한집에 들어가니

다섯명의 나이든 광대들이 북을치고 괭가리를 치면서 노래하고 춤을추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오광대인것 같았다.

선창가로 내려와서 정박소에가서 물어보니 12시에 배가 있다고해서 다시 여인숙으로 올라가 배낭을 찾아 배로 향했다.

배로 가는길에 선창가에서 사진이 찍고 싶었다.

카메라가 자동은 됐는데 삼발이 없었다.

젊고 깨끗하게 양복을 입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사진을 찍어줄수 있냐고 물었다.

행세가 선창가는 지나가지만 흙을 안 묻히고 사는 건달 같았다.

직장을 다니는것 같지는 않지만 기지바지에다 광이나는 구두를 신은게 선창가에서는 전혀 안 어울렸다.

그래도 후줄구래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카메라를 맡길수가 없을것같아 그 사람에게 부탁했는데

나중에 현상을 해보니 이건 완전 바보였다.

구도는 관두고라도 나를 향해 찍어야 하는데 샸터를 누르면서 카메라를 같이 눌렀는지 전혀 엉뚱한곳을 찍어 놨다.

나는 어디있는지 찾을수가 없었다.

옷만 멀쩡했지 완전 바보였다.

배에 오르니 이번 여행에서 나를 제일 감탄하게 만들고 많은 기억을 남겨준 거제도로 향했다.

 

 

충무에서 거제로 가는 배위에서..

 

비에 젖은체로...순천역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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