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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여행기

1975-7-14 (3)

by 늘 편한 자리 2013. 10. 9.

 

영동에서 내린 시간이 새벽 2시 30분,

떠들던 사람들을 뒤로하고 내린 사람은 나를 포함해 네 명이었다.

세명의 젊은 아가씨들이었는데 배지를 보니까 수도사대같이 보였다.

누군 대학 안 다니나 여기까지 뺏지를 달고 오냐 하는 생각에 피식 웃었다.

나중에 이야기를 해봤더니 구천동을 가는 학생들이었다.

대합실에 들어서니 시큼하고 퀴퀴한 냄새와 왠지 아주 가난한 사람이 사는 느낌, 어느 시골역이나 똑같이 나는 냄새가

그 새벽엔 그 냄새도 그 다지 나쁘지가 않았다.

이제 시작하는 여행을 생각하면 당연히 맡어야 하는 냄새였다.

동네 아주머니 몇 사람이 다가오더니 자기 집으로 가잔다.

싸게 해 준다나. 하지만 이제 서너 시간이면 버스를 탈 수 있는데 자러 가기엔 시간이 짧았다.

몇 번 들락거리더니 200원만 내란다. 그래도 웃고만 있었더니 가버렸다. 속으로 구시렁거렸겠지.

그런데 잠시 후에 곤란한 문제가 생겼다,

어마어마한 모기 때가 덤비는데 단단한 바지를 입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정없이 물어뜯는데

잠시도 서 있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우리보다 먼저 와 있던 등산복 차림의 여자들은 아랑곳 않고 의자에서 자고 있다.

그 많은 모기가 얼굴 주위를 날아다니는 게 보이는데도 천하태평으로 자고 있었다.

저녁에 출발해 한숨도 못 잤더니 눈이 충혈돼서 따가웠지만 아침에 움직일 계획을 짜느라 노트를 꺼내 지금의 느낌이나 적으려고 했는데

건너편에 있던 여학생들이 흘끔거린다. 자기들끼리 하는 소린데도 내 귀에 까지 들린다.

"새벽에 도착했다 모기가 많다" 등등 적겠지 하는 소리가 내 흉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몇 자 적어 보려다 노트를 덮어버렸다. 보는데서 쓰기가 계면쩍기도 했고 숫기가 없어 부끄럽기도 했다.

건너편에서 내 말을 하는 같이 내렸던 여학생 세명을 흘끔거려 봤다.

어차피 자기들도 내 흉을 보는 것 같아 나도 혼자지만 한번 까발려보려고 흘끔거렸다.

한 아가씨는 눈이 크고 얼굴이 둥그스름한 게 한국형이랄까 예쁘긴 한데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형이라고 하면 여자들이 싫어했던 것 같다.

돌려 말하면 세련되지 않아 시골스럽다는 것을 한국형이라고 한 거다. 한 명은 그렇게 잡았고

또 한 아가씨는 비교적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말을 건네면 대답도 안 하고 눈을 흘길 것 같은 새침데기로 생겼다.

원래 세침 때기가 더 쉬운 건데 한두 번 쏘아 부치면 그다음은 스스로 조심해지는데

꼴 갚지 않게 생겨가지고  잘난 척은 하고 또 때려잡아 버렸다.

나머지 한 아가씨는 노란색 티셔츠와 바지를 입고 약간 빨간색 스타킹을 신었는데 이 아가씨가 그중 마음에 들었다.

여성답게 보이고 말을 걸어도 대답도 해 줄 것 같았다. 그 아가씨와는 나중에 말을 주고받았다.

버스시간 하고 어디서 버스를 타는지 또 행선지는 어딘지.

왜 혼자냐고 묻기에 한두 군데만 가면 여러 명이 같이 움직이는 게 더 재미있지만 잠깐 들렸다 바로 다른 곳으로 갈 땐

꼭 반대하고 넘어지는 사람이 생길 것 같아 그냥 혼자 왔다고 했다.

가고 싶은 곳이 너무 많아 잠은 주로 차에서 자고 하루에도 여러 곳을 가고 싶다고 하니까

무척 신기하게 쳐다보고 입을 다문다.

 

중학교 일 학년 때 그런 경험을 하고 나니까 그다음은 웬만한 일은 별생각도 없이 하곤 했다.

못된 넘은 타고났는지 아니면 만들어지는지 그때까지는 모를 나이였지만 부모에게는 속 썩이는 자식이었다.

학교에서는 문제아 리스트 1번이라고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깡패같이 놀면서도 깡패는 아니고 그땐 또래보다 크기는 한데 애들을 때리거나 애들한테 못된 짓을 한적은 없었다.

오히려 편들어주고 대신 싸워주고 해서 애들이 선생님들이 나에 대해서 물어보면 나를 감싸주곤 했다.

단지 머릿속이 정리가 안된 천방지축이었다. 옆에서 훈계만 잘해줬어도 마음을 잡았었을 것 같은데

지금 나처럼 우리 아버지는 별로 자식들에게 말이 없었다. 특히 훈계 같은 건 하지 않았던 것 같다.

4학년 때 목포에서 광주로 이사 오기 전에 아버지가 모처럼 집에 계셨는데 마침 내가 국어 숙제를 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문이 한두 개씩 있었다. 자전거를 한문으로 써가는 숙제였는데

아버지께 물어봤다. 어떻게 쓰냐고. 그런데 지금도 기억나는 게 너는 아직 그것도 못쓰냐고?

학교에서 반장이나 하는 놈이 그런 한문도 여태 못쓰면 어떡하냐고 어머니한테 뭐라고 하셨던 것 같다, 

그때까지만 해도 부모가 집에서 천자문을 가르쳐주는 집도 많았는데

우리 집은 그런 것에는 전혀 아니었던 것 같다.

열두 시 사이렌이 불면 들어오시고 아침에 학교 가는 시간엔 항상 주무시고 있었다

어릴 때 집에서 공부라는 것은 부모가 시키든지 아니면 알아서 해야 하는데 나는 알아서 노는 쪽이었다. 

어렸을 때 내 우상은 아니지만 그만큼 좋아했던 가수가 남진이었다. 그때만 해도 극장에 가도 영화 주인공은 남진이었고

쇼를 한다거나 큰 행사에는 제일 먼저 이름을 올렸던 가수였다.

68년 겨울이었다. 그때도 별로 죄의식도 없이 몇 푼의 돈을 가지고 밤 열차를 탔다.

시민회관에서 쇼를 했는데 남진 차중락 김상희 등등이 나오는 쇼였다.

그걸 보겠다고 서울까지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시민회관에서 쇼를 보고 남대문시장에서 양복 기지로 만든 바지를 사 입었다.

중학생이지만 양복바지, 소위 기지 바지라는 게 너무 입고 싶었다.

바지를 사고 줄여야 할 것 같아 사람을 따라 골목으로 들어가 판잣집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남자가 재봉을 하고 있었다.

기장을 재고하는데 그 허스르음하고 판자로 엮어 만든 다 쓰러져가는 곳이 양복점이라고 하는데 너무 초라했다.

서울에서 어둑어둑해지니까 갈 곳이 없었다. 그때 외할머니댁이 영등포 오류동에 있었다.

여름방학 때 놀러 와 한 달씩 있다 갔기 때문에 가는 길을 잘 알고 있었다.

서울역에서 인천 가는 기차를 타고 오류동에서 내려 할머니 댁 앞에까지는 갔는데 들어가지는 못하고 문 앞에서 서성거리다 돌아섰다.

쌀쌀한 바람이 부는 저녁녘이었는데 집 앞 언덕에서 내려다보면서 못 들어가는 15실짜리의 기분이 어땠겠나.

지금도 할머니 생각이 나면 그때 그 저녁이 떠오르곤 한다. 

그런데 신기했던 건 그렇게 집을 나갔던 애가 하룻밤만 지나면 또 집으로 돌아가는 거다.

돌아가는 열차도 역시 야간 완행열차였다.

전날 밤기차를 타고 왔기에 자리에 앉자마자 잠에 떨어졌다.

그리고 새벽에 광주에 도착해서 사람들이 내리길래 잠결에 무심코 따라 내렸다.

잠결에도 뭐를 잃어버린 느낌이 들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지를 사 입고 갈아입은 옷이 들어있던 보따리가 없었다.

자리에 앉았을 때 창가에 놓고 잤는데 내릴 때 깜박한 것 같다. 광주가 종착역이라 다시 기차를 타고 몇 번을 돌아봤다.

처음부터 끝까지 몇번을 왔다 갔다 했는지 모른다. 못 찾았다.

아마 누가 들고 내린 것 같았다. 걱정이다. 그 속엔 내가 입고 나갔던 바지가 들어 있었다.

아무리 기지 바지가 좋다 해도 집에 들어갈 땐 갈아입고 들어가야 하는데.

더욱이 낮에 좋다고 산 반짝이는 기지 바지는 종이를 썩어 만든 바지인지 하루도 안 지났는데 궁둥이가 다 헤져버렸다.

지금도 가끔 가위에 눌린다고 해야 하나! 가끔 꿈속에서 보따리를 잃어버리고 애가 타도록 찾곤 한다.

그리고 일어나면 어김없이 그 새벽 열차 속에서 애타던 생각난다.

어디를 갈 때 다른 친구를 데리고 간다는 건 나쁜 거라고 생각했기에 누구에게든 말하고 싶지가  않았다.

애들이 가출하면 출세해서 돈 많이 벌어 돌아온다고 편지를 써놓고 가는 한심한 넘들도 많았다.

나는 그런 편지도 쓴 적이 없고 출세를 생각해본 적이 없이 그냥 잠깐의 생각으로 나갔다.

그리곤 그다음 날 집 주위를 배회하다가 집으로 잡혀 들어갔다.  

그렇게 혼자 다닌 게 여러 번이다 보니까  혼자 다니는 게 편했을지도 모른다,

 

7시에 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탔는데 우리 네 명, 새벽에 기차에서 내렸던 네 명이 같이 버스에 올라 무주로 갔다.

그곳에서 버스를 구천동 가는 걸로 갈아타고 목적지로 향했다.

그때가 가장 흥분이 됐다고 일기에 쓰여있다. 아마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돼서 그랬던가 보다.

 

지나치고 싶지 않았던 기억중 하나가  시골의 아침이었다.

새벽 5시가 되니까 해가 뜨기 시작했다.

어디서 왔는지 개 한 마리가 역 앞 광장에 앉아있는 내 주위를 맴돌더니 별것 아닌 듯이 가버린다.

자전거가 오는가 했더니 덜덜거리는 경운기가 보이고 학생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통학하는 학생들이 역으로 오는 게 보였다. 그날이 7월 15일이라 아직 중고등학교는 방학 전이었다.

호기심 찬 눈으로 우리를 보고 지나갔다. 어쩌면 그 학생들이 우리를 부러워했을 거다.

그땐 시골에서 학교를 다닌다는 것도 힘들 때라 어디를 놀러 가고 한다는 게 쉽지 않을 때였다.

6시가 되까 역구내는 통학생으로 꽉 차 버려 쳐다보는 눈길을 피할 자리를 찾어야 할 정도였다.

그래서 버스 터미널로 가서 괜히 시간만 한번 더 물어보고 역으로 돌아왔더니 그 새 기차가 왔었는지 학생들이 다 가고 없었다.

7시에 버스를 탔는데 그 버스에도 학생들이 많았다. 한두 군데 섰다 가니 버스는 시내버스가 돼 버렸다.

다행히 자리에 앉아한 30분 졸고 났는데 무주읍이라고 내리란다.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구천동으로 향했다.

구천동 가는 길은 완전 비포장도로였다. 쿵덕쿵덕 머리는 버스 천정에 닿을 정도로 튀어 오르기도 하고

엔진에서 나는 열기에 기름 냄새에다차에서 나는 소음은 시끄럽기는 왜 그렇게 시끄러운지

버스에 오른 지 20여분이 지나니까 정신이 혼미할 정도였다.

구천동에서 흘러내려온 물인지 강처럼 흐르는 게 보였다.

햇볕은 쨍쨍한데 땀은 그다지 나지 않았다. 지대가 높아 그런 것 같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시퍼런 물이 나를 반기는지 햇볕을 반사하는 게 눈이 부셨다.

제법 많은 나무들이 푸른 산을 꾸미고 굽이굽이 내를 끼고  평풍처럼 펼쳐 있었다.

한참을 버스를 타고 오르니 일사대가 보였다.

깎아 세운 암벽과 시퍼런 물이 눈을 현혹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나제통문을 지나서 구천동 계곡의 종점인 월하탄으로 버스는 달렸다.

 

 

 

무주구천동 일월정 앞에서

 

 

무주구천동 비파담에서 안 심대 오르는 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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