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래전 여행기

1975-7-14 (5)

by 늘 편한 자리 2013. 10. 14.

 

대전행 버스는 직행이라서 그런지 의자가 아주 편했다.

돈이 비싸니까 사람도 별로 없어 두 자리를 차지하고 편하게 갈 수가 있었다.

영동에서 무주구천동까지는 비포장 도로였다.

덜컹거리는 버스를 아침 저녁으로 탔으니 힘도 많이 들었는데 이제 의자가 편하니까 마음까지 편해 지는것 같았다.

창밖의 풍경은 언제 다시오나 싶어 머리에 담으려고 노력했지만 영동을 지나면서 포장된 길이 나오니까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 버렸다.

한 30분쯤 졸다 보니 제법 집들도 많아 지고 생김새도 영동 하곤 다르게 보였다.

시내로 들어가자 오후 6시 30분쯤 됐는데 사람들이 조금전에 있던 곳 하고는 아주 다르게 넘쳐흘렀다.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대전역으로 걸어가는데 낮에 구천동에서 만났던 남녀를 만났다.

남자는 키가 훤칠하게 큰데 여자는 아주 작았다.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여자가 나에게 웃으라면서 인상을 너무 쓴다고 웃기는 말을 해서 셋이서 한참을 웃었는데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대전역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서대전역으로 갔다.

전에 기차를 차고 서대전역을 많이 지나 봤지만 역 주위를 볼 기회는 없었다.

그런데 기차 안에서 봤던 서대전역 하고 밖에서 본 서대전역은 너무 달랐다.

우선 포장도 안 된 도로와 역 주변의 집들이 너무 누추해서 어디 시골역 주위를 보는 것 같다. 역 광장도 맨땅에 자갈만 깔아놨다.

더욱이 해가 지니까 모기가 숨도 못 쉴 정도로 많았다.

아직 기차를 타려면 많은 시간이 남았다. 한데 잠시도 있을 수가 없어 계속 움직였다.

새벽의 영동보다 더 했다. 그래도 대합실 안 의자에서는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천하태평으로 자고 있다.

몸이 강철이라도 당해 내지를 못할 것 같았다.

역 주위에서 맴돌고 있는데 어느 아가씨를 만났다. 느낌이 상당히 고의적으로 나에게 접근을 했었던 것 같아

처음에는 그렇고 그런 여자인가 싶었다. 그런데 무슨 말을 나눴는데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 버렸다.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는데 당사자가 돌아서니까 아무것도 아니구나 했던 것 같다.

사실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혼자서 시간을 보내기가 뭐해 걸어서 역 주위를 돌아다니는데 여관 여인숙이 많았다.

사람들이 의자를 문 앞에  내놓고 앉아 있는데 누구 하나 나보고 자고 가라는 사람이 없다.

집 떠난 지 하룻만에 모양새가 초라해졌는지 사람들이 쳐다보기만 했다.

어느 젊은 여자가 나더러 들어오라고 한다, 그랬는데 옆에 있는 할머니가 말린다. 아마 돈 걱정을 했겠지.

속으로 웃음이 나왔지만 겉으로는 의젓한 채 걸었다. 여인숙이라고 팻말은 있는데 홍등가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구멍가게에 들어가서 우유를 사 마시는데 아까 역에서 봤던 아가씨를 다시 만났다.

속으로 여기가 집인가 하고 역으로 돌아가는데 나를 따라오면서 말을 건다.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일기에 썼다.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을 거다.

왜냐하면 기억이 하나도 없다.

서로 무슨 말인가 주고받으면서 역으로 가는데 벌써 12시가 다 되었다.

그래도  역 주위는 통금에서 해방이 된 구역이었다. 아무도 간섭을 안 한다.

그 아가씨가 다시 만날 수 있겠냐고 서울에 가고 싶다 하면서 자기 집 주소와 이름을 적어줬다.

이름하고 주소를 적어 줬는데 장난을 하는 것도 같아 역으로 돌아오자 찢어버렸다.

지금은 아무 생각이 안 나지만 그때 왜 나에게 접근을 했는지 한참 동안 미스터리였다.

 

새벽 1시 6분 특급열차는 정확히 도착을 했다.

서대전을 떠나는 여수행 첫차였다. 

서대전에서 여수까지는 약 7시간이 소요됐다. 기차에 사람이 많지 않았다.

내가 앉았던 옆자리에는 서울 사람이 탔다. 서울서 출발했으니 당연하 거겠지만

집 떠난 지 이틀도 채 안됐는데 서교동 사는 사람이라니까 반가웠다.

옆사람도 구천동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 둘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졸았는데

여행하는 사람을 이해를 하는지 잘 수 있도록 말을 중도에서 끄는 것 같았다.

새벽 6시가 넘어 남원역에 도착했다.

자기가 중간에서 먼저 내리게 됐다고 인사를 하고 내렸다. 잠결에도 참 따뜻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스치듯이 지나가는 남원역이지만 전에 막내 이모부가 기차를 타고 지나면 광한루가 보인다고 해서 찾아봤는데 못 찾았다.

남원역은 한식으로 꾸며져 다른 곳 하고는 좀 다른 것 같았다.

차장을 스치고 지나가는 여러 산과 들을 지나니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침바다, 어렸을 적 바다가에서 살았지만 그곳은 도시였다.

바닷가라도 바다가 없었다. 내가 찾기 전엔.

지금 보이는 새벽 바다는 전혀 다른 곳에 있는 건데 파도가 넘실 데고 우리가 항상 동경하는 그런 바다였다.

멀리 보이는 작은 돛단배, 커다란 상선 비교적 깨끗한 바닷물.

여수역이 가까워지면서 기차는 해변을 끼고 달렸다.

하지만 역에 도착해선 실망했다. 여기가 정말 여수시 역인가 하고.

너무 초라한 모습이고 역 앞의 번화한 곳이라고는 다 쓰러져가는 서부영화에서나 봤을 것 같이 너무 초라했다.

도로는 파헤쳐져 있는 곳도 많았고 역 앞은 무허가로 보이는 하숙집 같은 게 너덜너덜하게 많아 보였다.

너무 피곤해서 여인숙이 많이 보이는 곳으로 가서 보기에 깨끗한 집을 골라 들어갔다.

들어가기 전에 어떨지 각오는 했지만 빈대가 득실 될 것 같은 이불이 너무 불안했다.

아침이라 사람들도 안 보이고 조용해 그냥 누었다.

눈은 자꾸 감기는데 마음의 눈은 계속 떠져 옆으로 1.5M 길이로 2.2M 정도 되는 방이었는데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잠도 잠이지만 마음이 불안한 게 피곤한 몸뚱이 하고 같지가 않아 그냥 나와버렸다.

영양 보충한다는 생각으로 비교적 큰 식당엘 들어갔다.

손님이라고는 나 혼자밖에 없어 큰방을 혼자 차지하고 앉았는데 계획은 오후 배로 충무로 향하는 것이어서

식당 주인에게 배 시간을 물었더니 아침 8시 밤 7시경에 출발하는 것 두 번밖에는 없다는 거다.

허둥지둥 서둘러 시내버스를 타고 로터리라 불리는 정류장에서 내렸다.

 

1985년에 영주권 인터뷰를 하러 Baltimore Maryland에 갔다.

그때는 달라스에서 살고 있어 볼티모어를 갈려면 Newark New Jersey라는 곳으로 가서 비행기를 갈아타야 했다.

바로 가는 것도 있었지만 가격차이가 한 달 렌트비만큼 차이가 났다.

더욱이 변호사가 워싱턴에 살고 있어 아는 분 차를 빌려 타고 내려갔다 돌아와서 다시 비행기를 갈아타고 달라스로 돌아왔다.

이민 국일이 한 번에 끝나질 않으니까 세 번 정도 그렇게 갔다.

한 번은 빌려 탄 차가 8기 통 시보레였는데 얼마나 크고 길었던지 고속도로에서 빠질 때는 사인판에 닿을 정도였다.

눈이 조금 오고 추우니까 길이 얼었는데 빠지는 길에서 미끄러졌다.

그 긴 차가 구브러진길을 돌아서 옆으로 미끄러지는데 등골이 오싹한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였다.

더욱이 내차도 아닌데... 꽝.

앞 헤드라이트 쪽이 약간 스치면서 타이어 쪽으로 푹 들어가 버렸다.

차가 움직이면 타이어가 몸체에 긁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침 차에 있던 망치로 흠씬 두들겨 팼다.

지나가는 차들이 다 쳐다보는데도 있는 힘을 다해 두들겼다.

차가 원체 단단하게 만들어진 거라 그렇게 두들겨도 상처는 더 나지 않았다.

겨우 바퀴가 좌우로 움직일 수 있게 해서 돌아왔는데 변명은 할 수가 없었고

그 차가 거의 15년 정도 된 거라 버릴 때도 훨씬 지났지만 자기도 얻은 거였지만 집하고 가게만 다닌다고 끼고 있던 거였다.

그저 미안하다고 인사를 하면서 대신 마침 가게에 텔레비전이 없어 다음에 올 때 텔레비전을 한대 사가지고 온다고 했다.

19인치 금성 테레비를 200불을 주고 사다가 줬다.

그걸 달라스에서 사서 비행기에 싣고 볼티모어까지 왔으니 그땐 힘이 넘쳤던 것 같다.

차를 빌려주신 분하고는 그 뒤로도 형님 동생 하면서 오래 잘 지냈는데 바람난 형님 부인 덕에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가 없었다.

알고 있는 나를 배척해야 하니까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 남편하고 나 사이를 갈라놓았다.

 

영주권 인터뷰를 하는데 내 앞에 한 사람들은 표정도 안 좋고 무슨 조건을 많이 달고 나오는 것 같았다.

나는 왜 왔냐? 지금 무었하냐? 어떻게 사냐? 등등

그런데 나는 아주 간단히 묻고 와이프는 여기서 세금을 내고 일했으니까 이번에 영주권은 못 받고

본국에 가서 인터뷰를 하고 오라고 하는 조건 하나만 이야기하고는 인터뷰가 끝났다.

미국 와서 4년 만에 영주권을 받았다. 그때가 아마 86년 2월경이었다.

미국에 와서 수많은 착오, 스스로 만든 고생길을 다니다가 영주권을 받았다.

 

82년에 내슈빌에서 살기에는 할 일이 너무 없었다.

한 학기를 끝내고 일 찾는다고 다시 샌프란시스코를 갔는데 그곳에도 할 게 없었다.

처음에 왔을 때 도와줬던 아주머니가 취직을 시켜준다고 해서 기대를 몹시 했는데

소시얼 시큐리티 번호가 없어 못 해준다고 해 실망을 많이 했다.

현금을 받고 일을 했으면 됐는데 그것조차도 말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내 사정을 다 아는 분이 그곳까지 오라 해서 갔는데 그런 말을 하니까 너무 난감했다.

아마 그때부터 생긴 버릇이 항상 안되는 것도 먼저 생각하자였던 것 같다.

그때는 아직 주머니에 돈이 많이 남어있었다. 그 돈 때문에 여러 곳을 다니면서 고생을 자초했다.

그래도 이사를 다니면서 처음부터 미국의 관광지를 많이 구경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며칠을 있다가 바로 비행기를 탔으니까

아마 그때 호텔에 있으면서 아저씨를 만나 이런저런 정보를 들었더라면 그대로 주저앉아 무슨 일이고 했을지도 모른다.

가지고 온 돈만 가져도 집도 살 수 있었고 가게도 번듯하게 할 수가 있었는데 그런 기회를 다 잃어버렸다.

처음에는 그 아주머니가 고마웠다. 지금도 고맙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니 그때 그 아주머니를 따라가지 말었어야 했다.

나 스스로 여기저기 알아보던가 아니면 아저씨에게라도 연락을 해서 초기 이민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웠어야 했었다.

얼마 전에 예전부터 가지고 다니던 서류가방에서 아주머니가 내가 내슈빌에 있을 때 보내줬던 편지를 찾았다.

32년이나 가방에 있었는데 다른 봉투 속에 있어 못 봤었다.

너무 기쁘고 흥분이 돼 바로 편지를 띄웠다. 너무 연락을 안한걸 용서하라고...

사실 샌프란시스코에 다시 갔을 때 실망도 많이 됐었다.

너무 쉽게 오라고 하고 또 너무 쉽게 안된다 하니....

지금 생각하면 주인에게 소개만 해줬어도 일을 했을 거다.

어디 불법이 한두 사람인가...

편지를 띄우고 Zillow.com으로 그 집주 소을 찾아보니 2000년에 집이 팔렸다.

그리고 편지의 답은 벌써 일 년이 다 됐는데도 없다.

내가 갔을 때 아마 50대는 됐던 것 같으니까 지금 80이 넘는다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고맙다는 인사는 드리고 싶었는데 참 아쉽다.

미국 와서 살아 보니까 아파트에 두 사람이 산다고 돈을 더 내는 것도 아니어서 와이프를 한 달 만에 불렀다.

태어난 지 두 달 된 큰애를 업고 시카고 공항으로 온다기에 내슈빌에서 시카고까지 데리러 갔다.

비행기가 LA까지밖에 없어 일본으로 갔다가 몇 번을 갈아타고 그곳까지 왔다.

그때가 미국에서 살면서 제일 편했을 거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만 있었으니까.

 

일주일 만에 다시 차로 볼티모어로 향했다.내슈빌에서 차로 4일을 달려 상항에 왔는데 일주일만에 다시 볼티모어로 출발했다.

일주일을 달려 볼티모어 도착하니 갈 데가 어디 있었겠는가.

아는 분 집에 잠시 짐을 풀고 아파트를 찾는데 보름이나 걸렸다. 아는 분은 영주권을 해준다는 중개인였는데

처음엔 6개월이면 된다 했다 그래서 그곳까지 미리 가 있는다고 간 건데 4년이나 걸렸다.

보름쯤 지나니까 나가 달라고 부탁을 한다 자기들도 얼마나 힘들었겠나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 하지만

나올 때는 아파트에서 살만큼의 돈은 주고 나왔다.

일주일을 모텔에서 살다 아파트를 구해 들어갔다. 그 아파트가 액이 있는지 들어가면서부터 좋은 일이 안 생기고

와이프하고 매일같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싸우고 거기다 내가 복권을 하면 금방 부자가 될 것 같아 이천 불 정도를 쓴 것 같다.

그때 방 두 개 아파트가 180불이었으니까 일 년 치를 잃어버린 거다.

볼티모어는 이것저것 할 일은 많았다. 치킨집에서도 일하고 봉제공장에서도 잠깐 일했다.

11월 16일이 우리 큰애 생일인데 그날은 아이 돌날이었다.

사장이 일이 급하다고 사정을 해서 애도 데리고 와이프하고 일을 갔는데 이 사람들이 가면서 문을 잠그고 가버렸다.

밤새 공장에서 꼼짝을 못하고 일을 했는데 아침에 와서 미안하다는 말도 안 한다.

거기다 유학생이라고 다른 사람보다 돈도 적게 주면서 일을 요령 있게 빨리하면 더 깎았다.

봉제공장에서 배달을 가 야한 다고 해 차를 운전하고 뉴욕을 처음 가봤다.

길거리에 한국말로 된 간판도 보이고 식당도 몇 개 있는 것 같았다.

얼마 있다 살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니까 뉴욕으로 이사를 해볼까 하고 뉴욕을 갔었다.

길을 모르니까 지도를 들고 이리저리 헤매다 내슈빌에서 같이 학교를 다니던 김아무게에게 전화를 했다.

내슈빌에 있을 때 우리하고 아주 친하게 지내고 자주 우리 집에 와 놀다간 친구인데 안면몰수를 한다.

바빠서 못 나간다고 하는데 달래서 얼굴만 보자고 했다.

후러싱 어디선가에서 만나 것 같은데 자기 집에 가자고 할까 봐 미리 죽는소리를 하는데 난감했다.

어떻게 저렇게 쩨쩨할 수 있는가 싶어 옆에 있는 와이프 보기가 창피할 정도였다.

집에 오면 혼자 있다고 챙겨주고 같이 놀러 가고 했는데 불과 몇 달 사이에 처음 보는 사람보다 더 추잡한 것 같아

30년이 넘은 지금도 생각하면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다.

사실 한국에서는 만나 볼 수도 없는 쪼잔한 사람들이 미국에는 많다.

그 이유는 나와 살다 보니까 속에 있던 쪼잔함을 거리낌 없이 표현을 하는 것 같다.

그 뒤로도 그 이상으로 쪼잔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만 그때가 처음이라 더 기억에 남는 것 같다.

차로 이리저리 다니가 홀랜드 터널을 지나 저지시티 쪽으로 나왔다. 길가에 한국교회 간판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들어갔더니 집사 한 분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면서 목사님 댁으로 데려갔다.

이때도 정말 만나지 말어었야할 사람을 또 만났다.

다름 아닌 목사였다. 그분이 우리를 어떻게 한건 아니지만 한마디가 또 방향을 바꿨다.

집사님이 저녁에 자기 집에서 자고 내일 일자리도 알아보자고 해 너무 고마워 그러려고 하는데

목사가 그럴 필요 없다고 냉정하게  자기 집에서저녁이나 들고 가라 하니까 집사님은 그냥 가버렸다.

나중에 이야기해보니까 나하고 나이도 비슷하고 테네시에 있는 낙스빌이란 곳에 유학을 왔다가 이번에 목사로 부임을 

했다는데 학생이라서 그랬는지 우릴 보는 모습이 별로 탐탁지가 않은 모습이었다.

저녁 무렵이라 자기도 뭐 했는지 여기저기 전화를 해보더니 방을 얻겠냐고 물어 그러겠다고 했다.

우리를 데려간 곳은 아파트였는데 슈퍼 동생이 살다 이사를 갔다는데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고양이를 50마리를 키웠다는데 바닥은 풀칠을 한 것처럼 쩍쩍 붙고 화장실은 벽이고 천정이고 성한 곳이 없어

사람이 살았냐고 물어봤을 정도였다. 그 집을 보고 나서 목사하고 헤어져 다시 그 밤으로 볼티모어로 내려왔다.

그 후로도 얼마나 많이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그때 그 집사님을 억지로라도 따라갔어야 했는데....

그러고 나서 6년이 지난 후에 내가 식당을 한다고 볼티모어에서 져지 시티로 이사를 왔으니 얼마나 후회가 됐겠는가.

6년 후에 와서 수소문을 했더니 그 집사님은 이민 초기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신 분이라고 물어보는 사람마다 칭찬을 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그 교회에서 몇 년 있다 다른 교회로 옮겼는데 암으로 세상을 떴다는 거다.... 사십도 안됐을 건데    

 

볼티모어에서 사는 동안 힘든 일도 많았지만 무엇보다도 부부 사이가 나빠져 더 살고 싶지가 않았다.

영주권을 부탁한 중개인 집에서 며칠 머무르다 모텔로 쫓겨가다시피 가서 있다 학교를 가기 시작했는데

섬머스쿨부터 가기로 했다. 학교에 가서 상담을 하니 여름 방학 때 영어를 들으면 도움이 될 거라 해서 

영어클래스에 등록을 하고 다니면서 신세를 졌던 중개인 집 딸을 태우고 학교를 다녔다.

마침 살던 아파트에서 학교를 가는 큰 길옆에 집이 있어 태우기도 쉽고 그렇게라도 도와준 것에 보답을 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와이프가 식당에 취직해 다니는데 주인한테서 전화가 왔다.

애엄마가 많이 울고 있으니 데려가라는 거다.

나는 평생 해보지 않던 일을 해서 힘들어 그런가 보다 하고 태워고 돌아오면서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른다.

왜 미국은 와서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자학을 하고 있는데 원인은 전혀 엉뚱한 곳에 있었다.

감리교회를 다녔는데 목사 사모가 나이도 상당히 많은 분이었는데 애엄마에게 농담을 했는데

순진한 마누라는 그대로 곧이듣고 가슴을 태우다 일을 가서 거기서 울고 만 거다.

목사 사모가 지나는 말로 재민이 아빠 이쁜 아가씨 옆에 태우고 데이트하는 것 봤다고 한 거다.

그 아가씨도 같은 교회 다니는 중개인 딸이고 같이 학교에 가는 걸 보고 자기 딴에는 농으로 한 건데

마누라는 농담을 모르는 사람이라 그대로 곧이듣고 울고불고하더니 자기가 집을 나간다고

보따리를 쌌다. 나는 너무 기가 막혀 갈 테면 가라고 했는데 자기가 어디를 가겠는가 도로 주저앉아

나를 죽일 듯이 닦아 세웠다. 거기다 내가  한 가지 잘못한 건 새 학기 등록을 했는데 그 애는 어떻게 됐냐고 묻기에

같은 반에 들어왔는데도  마음이라도 편하라고 다른 반이라고 해버렸다. 그걸 나중에 알고 더 난리를 쳤다.

결국 삼자대면까지 하게 됐는데 세상에 살면서 생판 모르는 것하고 진배없는 여자를 두고 서로 좋아하느냐고 묻는데

그때는 내가 보따리를 싸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나는 잘못이 없다 하더라도 미국까지 가자고 해서 따라왔는데

이런 일로 내가 헤어지자고 한다면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더욱 웃기고 과간인 것은 그 여자애에게 우리 집사람이 물었다. 아저씨가 어떻게 했냐고?

그랬더니 아저씨가 이상했다고 대답을 하는 거다.

세상에 믿을 놈 없다는 말이 왜 생겼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농담 한마디 한적 없고 여자로도 안보였다. 이제 20살인가 먹었고

나는 이미 결혼하고 애 아버지인데 그런 꼬맹이 아가씨가 미국 온 지 일 년도 안된 내 눈에는 애기로 보였었다.

그런데 그 입에서 그런 말을 하니 싸움을 부치겠다는 의도였던 것 같다.

더욱이 같이 온 계모, 재혼한 엄마가 따라왔는데 그 사람까지 내가 이상하다고 거두니 마누라는 더 날뛰고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하는데

그때 또 하나 생긴 버릇이 있다. 절대 상대방이 곤란한 말은 아끼자.하지 말자.차라리 내가 곤란해지자.편은 안들더라도 

힘들게는 하지말자 이다. 그리고 아무리 지금 힘들어도 거짓말로는 절대 해결이 안 된다는 것도 알게 됐다. 경험으로.

그 아가씨도 이제는 50살이 넘었을 거고 따라온 엄마도 70살이 넘었을 거다.

내 입장을 한번 생각해봤을까 하고 몇 번을 생각해봤는지 모른다.

안 했다고 해도 그만이지만 그런 마음으로는 살아가는데 도움은 안 됐을 거다.

 

볼티모어에서 불과 반년 남짓 살다가 아저씨가 샌프란시스코에 오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오라 해서 다니던 학교도 포기하고

다시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차로 가는데 11월 말에 떠났는데 유타를 지나면서 눈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   

산 위에서 미끄러져 오도 가도 못하는데 지나가던 눈 치우는 차가 와서 삽으로 눈을 치워 차를 빼내 줬는데

차 뒤에 이사집을 실은 트레일러를 달았더니 눈길에서는 마음대로 움직여 아주 혼이 났다.

8박 9일 만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서 아저씨가 하는 일이 돈이 된다고 해서 따라갔더니 지붕 하는 일이었다.

하루에 50불을 준다고 해서 한 달이면 얼마고 하는 계산을 했는데 일주일이 가고 이주일이 가도 일이 없었다.

아저씨가 운전을 못해 일을 직접 못 따니까 나를 운전수로 오라고 한 건데 일이 없는 거다.

한 달 동안 4일인가 일을 했으니 앞일이 캄캄했다.

길을 가다 찾아 들어간 교회 목사님이 고맙게 일을 알아 봐줬는데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서 청소를 하는 거란다.

한 달에 1500불인가를 준다고 해보라고 하는데 아직까지 한국에서 가져온 자존심이 공항에서 빗자루는 못 들겠어서 안 한다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 온 것 같고 또 학교를 포기하고 온 것도 잘못한 것 같아 다시 처음에 간 내슈빌로 돌아가기로 했다.

떠난 지 8개월 만에 다시 돌아가는 거였다.

한 가지 몰랐던 건 학교를 옮길 때만 다 신고를 해야 했었는데 가고 싶으면 가고 옮기고 싶으면 옮긴 게 나중에 큰 화가 됐다.

다시 돌아간 내슈빌에서 할 일이 바느질하는 것 밖에는 없었다.

둘이서 일주일 내내 일을 해도 150불 벌이도 힘들었다.

볼티모어 살 때 새벽에 비명 소리가 나서 일어나 보니 와이프가 밤잠을 안 자고 바느질을 하다 미싱 바늘로 손가락을 박아버렸다.

어떻게 뺐는지는 몰라도 다행히 덧나지 않았는데 여기서도 밤잠을 안 자고 해도 벌이가 안됐다.

일감을 주는 사람이 나보다 더 버는 것 같은데 뭐라고 할 수도 없고 그저 그나마라도 주십시오 하는 마음뿐이었다,

시골이라 영주권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세금을 못 내니까 주는 데로 받았다.

몇 달을 살았는데 아는 분이 자기 아들이 달라스에서 봉제공장을 하는데 그곳에 가면 일도 많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다고 해

주저 없이 차를 타고 일단 한번 가봤다.

타고 다니던 8기 통 포드 LTD가 다 된 것 같아 처음에 샀던 곳에 갖다 주고 폭스바겐 버스로 바꿨다. 천불인가를 더 준 것 같다.

달라스를 가는데 아무리 밟아도 50마일이 안 나오는 거다.

또 끄떡하면 시동이 안 걸려 지나가는 사람에게 밀어달라고 부탁을 해서 고생 고생하고 갔는데 가서 자세히 보니까

4기 통짜리가 2기 통만 되고 2기 통은 선이 끊어져있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거기까지 세 식구가 간 거다.

달라스는 깨끗하고 내슈빌보다 훨씬 큰 것 같았다.

 

달라스에서 봉제공장 주인에게 이사를 오기로 하고 내슈빌에 돌아와 준비를 하는데 둘째애가 생긴 걸 알았다.

날짜를 따져보니 샌프란시스코에서 생긴 것 같았는데 도저히 낳고 키울 능력이 안될 것 같아 

유산하기로 하고 보건소에 예약까지 했다.

친구 부인이 유산도 애를 낳는 거라면서 미역국까지 가져다줬다.

그때는 그게 그렇게 큰 죄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남들도 다 하는 건데 하는 기분이었다.

사실 우리 큰애가 생기 전에 연애하는 동안에 애가 생긴 적이 있었다.

와이프가 대구에서 은행을 다니고 있었고 나는 서울에 있었는데 그 말을 하길래 아무 생각도 없이 

지우라고 했다. 사실 그때는 그게 얼마나 큰 죄악 인지도  몰랐다. 남들도 하는 것 같아 우리도 한다는 마음이었다.

둘째를 낳고 애들이 다 장성해 가니까 내가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를 알았다.

그때 그 애를 낳았으면 우리 큰애는 이 세상 구경을 못했을 거다.

둘째도 다른 애가 생겼을 것이고. 세상은 순 리데로 살아야 하는 건데 저질러 놓고도 너무 쉽게 엄청난 일을 한 거였다.

나중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서 그 애를 만나게 된다면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벌을 받아야 할 거다.

둘째가 생겼다 해서 너무 쉽게 병원까지 얘 약을 했는데, 왜 그랬는지 한국으로 어머니에게 전화를 하고 아무래도 이번에는

포기하고 다음에 낳아야겠다고 말했더니 그러라고 하신다.

너희가 힘들게 사는데 또 애가 있으면 어떡하냐고.

그리고 전화를 끊었는데 조금 있다 다시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이번에 계를 타는 돈이 조금 있으니 그걸 보낼 테니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신다.

만약 그때 둘째를 포기했으면,,, 정말 그런 짓은 하면 안 된다.

이천볓백불을 보내 주셨는데 그 돈은 이사비용으로 다 쓰고 

애는 교회에서 이야기해줘 유학생이라고 감리교회 병원에서 공짜로 낳게 해 줬다.

 

달라스로 이사를 가고 처음 몇 달, 불과 두세 달은 그렇게 지냈다.

헌데 여기도 일이 없었다. 좋은 건 봉제공장이 많아 내가 마음만 먹으면 이곳저곳 다니면서 일을 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일을 하고 세금을 내면 영주권을 받을 수가 없다고 하니 집에서 꼼지락 거리는 일밖에 없었다.

학교에서는 아주 좋은 성적을 받아 이제 자리를 잡고 사는가 했는데 

그때 텍사스 주립대학 등록금이 유학생은 12시간 풀타임으로 660불이었다.

미국에서 제일 등록금이 쌌다. 그런데 새로 된 주지사가 등록금을 300%를 한꺼번에 인상해버렸다.

이제는 2000불을 내야 학교를 가는데 내 능력으로는 그 돈을 델 수가 없었다.

한 달 아파트가 250불 정도였는데 일 년 치 생활비를 학비로 내야 하는데   

일 년 다니고 결국은 포기했다.

같이 학교를 다니던 친구가 주유 소하고 가게가 붙은 곳에서 사람을 구한다고 소개를 해줬다.

얼마를 준다고는 정하지 안 하고 일을 시작했다. 밤 7시부터 아침 7시까지 12시간을 일하는 건데

꼬박 6일인가를 했다. 그런데 매니저라는 친구가 시간이 바뀌었다는 거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 학교를 갈 수가 없어 그건 안 되겠다고 했더니 그럼 그만두라고 6일 일한 걸 계산해주는데

60불을 주는 거다. 하루에 12시가 6일이면 72시간, 그것도 내차로 와서 일한 건데

너무 하지 않냐니까 하는 말이 수습이었다는 거다,

너무나 기가 막히고 더욱이 매니저라는 친구도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었는데 너무한 것 같았다.

돈을 도로 줬다. 이런 건 안 받는다고. 아무리 내가 어려워도 이런 추잡한 돈은 안 받겠다고 주고 나왔다.

그랬더니 같이 간 친구들이 따지겠다고 다시 간다고 했다.

내가 자존심이 너무 상하니까 잊어버리자고 했다.

그리고 집에 와서 이야기하니까 애엄마가 세상에 그럴 수가 있냐고 운다,

그래서 역시 내 장사를 해야 그런 꼴을 안 본다고 친구가 장사하는 걸 도와주러 갔다. 

장사를 하는 걸 옆에서 도와주다가 나 스스로 시작해서 물건도 얼마 없이 다녔는데 

타고난 장사꾼이라 몇 달 만에 조그마한 가게 자리를 얻어 장사를 하는데 돈이 없으니 

물건을 살 수 없어 진열장에는 박스만 진열하고 알맹이는 따로 팔았다.

손님이 박스를 보고 달라해도 안이 비어 있으니 팔 수가 없다,

돈이 없으니 물건을 살 수 없어 집에 가지고 있던 미싱을 팔려고 친구 집에 부탁을 하러 갔다.

그런데 마침 양복점을 하는 오 사장님이라는 분이 계시다 나에게 천불을 빌려 줄 테니 미싱을 팔지 마라 한다.

생전 처음 본 분인데 부탁도 안 했는데 돈을 빌려준다고 해 너무 고마웠다. 

그리고 같이 학교를 다니던 마창진이라는 친구도 자기가 도와준다고 1500불을 빌려줬다.

그리고 또 한 학생은 나이가 좀 많았는데 자기 차를 사는데 따라가 주면 돈을 2천 불을 빌려준다고 했다.

돈을 빌려주면서 각서를 받는데 내가 죽으면 마누라가 갚어야 하고 마누라도 못 갚으면 자식들이라도 갚어야 한다고 써왔다.

종이를 찢어버리려다가 생각해보니 그 사람도 어렵게 번 돈이라 그렇겠지 하고 사인을 해줬는데

돈 갚은 뒤에도 종이는 안 돌려받아 아직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나중에 들으니 마누라가 바람이 나서 남편을 버렸다는데 확인은 못해 봤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을 거다.

마창진이라는 친구는 돈을 빌려주는 조건이 우리 가게에서 파트타임을 하겠다고 하고 줬는데 

가게라 해봐야 100 스퀘어도 안되는데 우리 와이프 그리고 애들은 맡길 수가 없어 

둘 다 데리고 나오니 사람이 애들까지 네 명이 있으니 어땠겠는가? 

아무리 힘들어도 집에서 바느질하는 것보다 나으니까 와이프도 너무 좋아하고 

마침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장사도 제법 됐다.

그리고 물건도 조금 사서 진열하고 하니 부자가 된 기분으로 장사를 나갔던 것 같다.

나는 따로 차에 물건을 싣고 이리저리 다니면서 장사를 하고.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보니 물건도 조금 남고 돈도 다 갚고도 천여 불이 있었는데 한국에서 몇만 불을 가져와 일 년 만에 다 쓰고 기름값도 없었는데 앞으로 장사만 하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니 이제 살았구나 하고 마음이 놓였다.

집안에 물건이 가득 차게 되고 나갔다 오면 하루에 몇백 불, 잘될 때는 천불도 넘게 가져왔으니 

그때 한 달 렌트가 350불인가 했으니 하루 장사에 한달 생활비기 해결이 됐다. 

하지만 학교를 다시 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다시 학교를 간다면 식구들을 또 힘들게 하는 것 같아 나중에 자리를 잡게 되면 가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 뒤로도 여러 번 학교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한번 놔버리니까 다시 간다는 게 어려웠다.

더욱이 돈의 여유가 조금씩 생기니까 더 가기가 어려웠다. 자동차가 작으니까 큰 차가 필요했다.

옆에서 보던 또 한 친구가 돈을 몇천 불을 주면서 자기 생활비니까 날자에 맞혀  주라고 하면서 빌려줬다. 

그렇게 자리를 잡으려고 하는데 영주권 신청한 게 나왔다.

스폰서가 있는 메릴랜드로 이사를 해야 하는데 이제 겨우 살만하니까 또 보따리를 쌌다.

그러면서도 미련이 남어 애엄마 보고 여기서 장사를 하고 있으면 내가 주말마다 온다고 했더니

기겁을 하고 같이 가야 한다고 한다. 너무 아쉬웠다. 자리도 다 포기하고 간다는 게.

메릴랜드에 와서 한두 달 살고 나니까 와이프 영주권이 급했다.

사실 하나도 안 급한 거였는데 괜히 서두르다가중국 변호사가 한국에 가면 사흘이면 인터뷰하고 들어 올 수 있다는 말에

정말 한치의 의심도 없이 비행기를 태웠다.

미국 온 지 오 년 만에 한국을 가는데 애 둘을 데리고 갔다.

그런데 사단이 생겼다. 변호사가 중국사람이라 중국을 생각한 거다. 그때 취업이민이 한해 열고 한해 닫고 할 때였는데

중국은 항상 열려 있었다. 이 사람이 착각을 한 거다.

9월 3일에 비행기를 탔는데 9월 말에 취업이민 문호를 닫아버렸다.

다시 돌아오는데 일 년삼개월이 걸렸다.

지금은 30년이 다 된 이야기니까 쉽게 쓰지만 그때 젊은 나이에 일년 삼 개월을 혼자 지냈을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변호사를 혼내줄 생각을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1983년 어느 날... 내슈빌에서 달라스로 이사 가는 길.

 

 

1986년 9월 케네디 공항에서 애들이 못 돌아오는 걸 알았는지 울상이다.

 

 

 

'오래전 여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75-7-14 (7)  (0) 2014.05.05
1975-7-14 (6)   (0) 2014.03.30
1975-7-14 (4)  (0) 2013.10.10
1975-7-14 (3)  (0) 2013.10.09
1975-7-14 (2)  (0) 2013.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