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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여행기

1975-7-14 (4)

by 늘 편한 자리 2013. 10. 10.

 

무주구천동이란 말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구천동이란 말이 아주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구천동 종점은 첩첩산중의 허리를 깍아 내린듯한 계곡의 중심으로 깊게 파고 들어가 있었다.

많은 여관이 전망좋은 허리 턱에 자리 잡고 식당도 몇 개가 보였다.

엊저녁 이후 계속 굶어 식당에 들어가 허기를 달래고 싶었지만 외모만 봐도 수저조차 들려지지 않을 것 같아 그대로 가기로 했다.

같이 내린 세 아가씨는 여관안내인 같은 제복을 입은 사람에게 이끌려 그대로 가기로 한 것 같았다.

한마디 인사라도 하고 싶었지만 서로 멀거니 쳐다보면서 지나치고 말았다.

 

년전에 내 여동생이 과외를 한 적이 있었다.

S대를 다닌다는 여학생이 와서 가르쳤는데 동생 친구하고 셋이서 공부를 하는 걸 몇 번 봤다.

어느 날인가 집에 오는데 과외선생하고 동생 친구가 공부를 끝내고 가는지 길에서 마주쳤다.

그대로 지나기도 머 해 내가 먼저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했다.

헌데 반응이 정말 싸가지였다.

어머머 별꼴이야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썩은 미소를 짓는데

아! 내가 실수를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긴 걸로 봐선 절대 남자 친구도 없게 생겼는데 하는 짓도 생긴 것 하고 똑같았다.

말은 나오면 다시는 들여 넣을 수가 없는 물건이다.

취소할 수는 더욱이 없고, 꼼짝없이 바보 천치가 된 거다.

그 뒤로부터는 나도 모르게 경계심이 생겼다.

인사를 하기 전에  과연 저 여자가 내 인사를 받을 건가 아니면 그때 그 싹수없는 XX이 될 건가 하고.

역시 나쁜 버릇은 빨리 몸에 휘 감긴다. 그리고 딱 붙어 니 발 빼라고 버틴다.

그 여학생들에게도 아마 그런 나쁜 기억이 있어 말을 못 했던 것 같다.

물론 지금이라면 싸가지가 있던 없던 일단 간을 볼 건데.

 

입구에 있는 가게에서 라면 한 봉지를 사 가지고 올라갔다.

입장료를 80원이나 받았다. 너무 비싸다고 생각했다.

국립공원이라고 꼭 돈을 받아야 한다고는 생각을 안 했지만 일단은 80원이 아까웠다.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다 보니까 관리비가 엄청날 거라는 생각은 들었다.

비파담, 금포탄, 수없이 이름이 많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인월 담을 지나서 계속 올라가니까 송어양식장이 있었다,

또 특이하게 조랑말이 끄는 마차가 화려하게 단장을 하고 손님을 기 달리고 있었다.

송어양식장에 들어가 봤지만 특별한 건 아니고 그냥 양어장 같았다,

돈 내고 즉석회를 맛볼 수 있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다시 올라가 비파담이라는 케른을 지나니 계곡을 접하는 샛길이 나왔다.

그곳은 바위로 형성된 길이었다. 바위가 끊어진 작은 절벽 허리에 구름다리를 벽으로 부착해놨다.

그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라면을 끓여 먹고 계곡물로 커피까지 타서 마셨다.

역시 라면은 냄비 뚜껑에 후후 불어서 먹어야 맛이 최고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위에서 목욕한 물로 라면에 커피까지 마시고 했다.

목욕한물로 끼니를 때웠다고 기분이 께름칙했지만 이미 들어간 걸 꺼낼 수도 없고 배만 한번 쓱 쓰다듬고 말았다.

구름다리를 지나서 백연사 앞으로 가니 거기서도 입장료를 받았다.

한데 놀라운 것은 덕유산 등산로가 절 입구로 들어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또 50원을 입장료로 내고 절 옆으로 나있는 샛길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스스로가 곤란하거나 필요하다면 몇 끼를 굶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고 또 그런 적도 몇 번 있었다.

한데 지금은 달랐다.

1594m, 평소에도 웬만한 다짐으로 오르기 힘든 코스인데 전날 밤과 아침을 꼬박 차로 온 데다 수면부족까지 겹쳐 체력이 말이 아니었다.

20M 정도 올라가면 그만큼 주저앉아 쉬어야 할 정도로 힘이 들고 다시 일어 설려면 매고 있는 배낭은 엄청나게 무겁고

어깨는 까지고 땀은 온몸을 적시고 다리도 계속 후들거리고 머리는 뜨거운 했볕에 벋겨질것 같고

혼자서  투덜투덜 푸념을 하는데 도저히 힘이 들어 올라갈 것 같지가 않았다.

생각으로 1200M 정도 오르지 않았나 하는 지점에서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산중에 혼자라는 공포심과 또 바람소리는 흡사 맹수의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한발 한발이 짧아지고 주위를 경계하니 더 더디고 결국 하산하기로 했다.

지금도 가끔 그때 소리가 생각이 난다.

정말 소름이 끼쳤다.

물론 여럿이 있거나 뱃속이라도 든든했다면 객기를 부려서라도 올랐을 건데 지금 생각해도 등허리가 오싹할 정도로 무서웠다. 깊은 산중에 혼자 가는데 자꾸 우는소리, 짓는 소리가 들린다면 누군들 마찬가지일 거다.

바람소리가 산속에서 그것도 산 위에서 나무를 스치며 내는 소리는 실감 나게 무서웠다.

내려오면서 주막집이 있길래 물을 한잔 청했다.

계곡에서 긴 호스를 연결해 받는 물인데 그 물맛이 기가 막혔다.

얼음물인 듯 그렇게 시원하고 주스인들 이런 맛을 낼 수 있을까 하고 일기에 적었다.

설탕도 감미료도 필요 없다 혀끝이 물리며 이빨이 시려 울 정도였다.

다시 마을로 내려오니 2시 30분 정도가 됐었다.

4시간 정도에 상봉까지는 못 가봤지만 웬만한 구경은 다한 셈이다.

여기서 욕심이 발동했다.

이길로 남원으로 가면 경비도 적게 들고 여행시간도 단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3시 30분에 떠나는 막차를 타고 구천동을 나오면서도 하룻밤이라도 지내고 나올 걸 하는 후회도 했었다.

5시에 무주에 도착하니 남원행 버스는 이미 끊어지고 나가는 차라고는 대전행 직행버스밖에 없었다.

그것마저 출발하려고 시동을 걸고 있었다.

내가 허둥지둥 결정을 못하고 왔다 갔다 하니까 나를 구천동에서 태우고 온 버스기사가 나에게 자고 내일 가란다.

내가 답답하게 보여서 그랬는지 아니면 도움을 줄려고 그랬는지 자기가 자는 숙소에서 자고 아침에 떠나란다.

고맙기는 했는데 나는 자리가 바뀌면 잘 자질 못한다, 물론 여행을 떠난 사람이 자리 탓을 하면 안 되지만

미리 불편할 것부터 생각이 드니 정중히 거절을 하고 말았다.

구천동에서 하룻밤을 자고 나올 걸 하고 후회를 또 했지만

다시 구천동으로 돌아갈 차도 없고 그렇다고 무주에서 머물를 수도 없어 서둘러 대전행 직행버스에 올라탔다.

 

미국에 온 게 1981년 12월 16일이다.

그때도 너무 서둘러 비행기를 탔다는 게 살아오면서 뒤 돌아볼 때마다 후회가 많이 됐다.

미국이라는 곳을 더 알아보고 비행기를 탔더라면 처음부터 단추를 잘 꿰었을 것 하는 후회다.

처음에 LA에 도착했다. KAL을 타고 와 내리니 오전인지 오후인지 정오쯤 된 것 같았다.

입국 수속을 하는데 영사가 돈이 얼마 있냐고 물어봤다. 순간 아! 잘못됐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려는데 어머니가 다니던 양장점 주인아주머니가 보따리를 하나 들고 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동생에게 전해주라고 부탁하면서

나에게 주의를 주기를 미국에 가면 절대 돈이 $5000 이상 있다고 말하지 마란다.

미국 사람이 알면 세금으로 다 뺏어간다고.

그래서 비행기에서 입국사증을 쓰면서 돈이 얼마 있냐고 물어보는 란에$5000이라고 썼던 것 같다.

유학생은 비자를 받을 때 재정보증서를 비자에 스테풀로 같이 묶어주는데 봉투에 들어있어 그게 먼지를 몰랐다.

열어보지 말라고 해서 안 봤는데 그 속엔 내가 은행에서 만들었던 재정보증서가 들어있덨던거다.

거기엔 내가 미화로 $13000을 가지고 미국을 간다고 쓰여있었는데 그걸 $5000에 쓱싹 하려고 했으니

영사가 물어보는 게 당연했다.

그래도 순발력은 엄청 빨라  $13000 있다고 했다. 그랬더니 왜 여긴 $5000로 쓰여있냐고 물어봤다.

사실 그때 살아본 사람들은 다 알다시피 한마디 I don't know 하면 데게는 봐줬다.

나도 그랬다 그랬더니 고개를 흔들더니 가라고 한다.

미국 사람이라는 우월감에 동양에서 온 촌넘이 뭘 모르는구나 한걸 거다.

미국에 들어오자 말자 다 털릴뻔한 것 같아 가슴을 쓸어내리고 밖으로 나와 미국 냄새를 처음 맡아봤다.

버터 냄새가 났다.

그때 이후론 한 번도 그런 냄새를 맡아본 적이 없지만 첫 냄새는 버터였다.

몇 시간 후에 비행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그곳엔 아버지 친구분이 일 년 전에 이민을 와서 한번 만나 보겠다는 생각에 그곳으로 먼저 갔다.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 도착하니 밤 8시쯤 됐는데 나와서 반길 줄 알았던 아저씨는 안보였다.

공항은 엄청나게 큰 것 같았고 그때까지 한국 김포공항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한 한 시간쯤 기다리는데 이민가방이 두 개에 작은 손가방 하나, 그리고 전해주라는 보따리가 하나

내가 옮길 수가 없을 만큼 크고 많은 보따리를 들고 서 있는데 끝내 아저씨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동양사람같이 생긴 젊은 남자가 나에게 오더니 왜 여기 있냐고 물었다

그래서 아저씨를 기다린다고 했더니 얼마나 기다렸냐고 다시 묻는다.

한 한 시간쯤 된다고 했더니 내 가방을 다짜고짜로 들더니 여기 있으면 안 된다고 한다.

여기는 무서운데라고 하면서 지금까지 안 오면 안 오는 거라고 내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간다.

어딜 가나 봤더니 택시 타는 곳으로 가서 나더러 여기서 서 있으면 위험하니까 빨리 여길 떠나라는 거다.

엉겁결에 그 말이 맞는 것도 같아 그냥 고맙다고 말하고 택시를 타고 다운타운으로 가자고 했다.

내가 어디서 왔냐고 물었더니 타일랜드라고 했던 것 같았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누가 나를 노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걸 이 친구가 눈치채고

같은 동양사람이라고 도와준 게 아닌가 싶었다.

다시 만나지는 못했지만 스치는 인연이 아니고 나를 구해준 구세주였을지도 모른다.

택시를 타고 다운타운으로 들어가니 고속도로가 넓고 한국에서는 보지 못한 많은 차들이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더욱이 내가 탄 택시도 엄청 컸다. 그때는 웬만하면 8기 통 차가 택시를 했으니 얼마나 컸겠는가.

고소도로 옆에 세워진 간판들을 보니까 영화에서나 보던 그런 모습들이었다.

운전기사가 나에게 다운타운 어디로 가는가 묻는다.

그래서 아저씨 주소를 줄까 하다가 생각에 아저씨가 나오지 못할 사연이라도 있는가 싶어

아무 호텔로 가자고 했다. 시내에 있는 호텔에 데려다줘서 기사 보고 기다리라고 하고 로비에 가서 빈방 있냐니까 있다 한다.

키가 아주 크고 늘씬한 까만 피부를 가진 여자였는데 알았다고 돌아서는 나에게 잠깐 하더니 얼마인 줄 아느냐고 묻는 거다

당연히 모른다고 했다. 그랬더니 비싸다면서 하룻밤에 $80이란다. 그때 한국 환율이 아마 800원 정도 했을 거다.

그러면 64000원, 웬만한 사람 반달치 봉급이니 그냥 미안하다고 나왔다.

기사가 나에게 미야꼬 호텔을 아냐고 묻는다. 알턱은 없었지만 아는 척했더니 그리로 간단다.

미야꼬 호텔에 가서 먼저 얼마냐고 했더니 여기도 $80이란다 그래서 삼일만 있겠다고 $240을 줬더니 선금은 안 받는다나..

왜 안 받냐고 따져가면서 현금으로 다 줬다. 성질이 급한 건 한국사람이다.

그리곤 택시에서 짐을 내리는데 마침 벨보이가 다른 사람하고 올라가버려 나 혼자 가방네개를 에레베이터에 싣고 올라갔다. 

낑낑 데면서 가방을 들고 올라가 방을 보니까 아주 깨끗하고 컸다. 한국에서 호텔을 여러 군데 가봤지만

그래도 미국 호텔이 방도 크고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행기를 갈아타고 마중 나올 줄 알았던 아저씨는 안 보이고 혼자서 여기까지 오고 보니

아직 밥도 한 끼 못 먹었다. 저녁 9시가 다됐는데 사실 배가 고픈 줄도 몰랐다.

너무 경황이 없이 다니다 보니 배고픈 건 아예 잊어버렸던 것 같다. 방에 있는 메뉴를 보니 비싼 건 아니지만

선뜻시키기도 뭐하고 또 방으로 배달이 되냐고 물을 수도 없고 해서 밖으로 나가보려고 옷을 갈아입는데 뭔가 허전했다.

윗저고리 안주머니에 넣어둔 지갑이 없다. 그 속엔 조금 전에 방값을 지불하고도 $3000이 넘는 현금이 있었는데 지갑채 없는 거다.

가방을 다 털고 옷을 다 뒤집고 난리를 쳤는데도 지갑은 없었다.

아마 로비에 놔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한걸음에 로비로 갔더니 백인 친구가 무슨 소릴 하느냐는 듯이 쳐다본다.

내가 조금 전에 너에게 돈을 지불하고 지갑을 여기 두고 간 것 같다고 해도 실실 웃기만 하지 그저 모르겠단다.

혹시 몰라 문 앞으로 가서 가방을 들 때 떨어졌나 바닥을 안으로 밖으로 봐도 없었다.

백인 친구가 나를 부르더니 지갑이 어떻게 생겼냐고 묻는다. 붉은색을 띠는 장어가죽으로 만든 긴 지갑이라고 했다.

내가 미국에 왔을 때 첫날이었지만 언어로 전혀 불편한 게 없었다.

영어를 잘했을 리 없었겠지만 학교에서 배우고 밖에서도 대화를 많이 했었다.

무역을 한다고 만나던 상대가 일본 사람이었지만 그 사람이 영어를 썩 잘해 대화하는데 서로 불편함이 없었다.

전에 외국사람하고 대화를 많이 해본 경험이 전혀 더듬거리 지를 않았다.

내 말을 듣더니 혹시 모르니 지하에 있는 식당에 가보란다. 그래서 식당으로 한걸음에 뛰어갔다.

일본식 식당이었는데 주인인지 케쉬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지갑을 찾는다니까 캐쉬어 옆에 있던 내 지갑을 보여 주면서 이거냐고 묻는다.

맞다, 맞다고 하면서 어디서 주웠냐니까 저쪽에 앉아있는 신사들이 주워서 여기에 맡겼단다.

지갑을 열어보니 돈도 그대로였다.

너무 고마워하니까 가서 인사하라고 한다. 네 사람들을 다 기억 못 하지만 그중 한 분은 암스트롱 대학 교수라고 했다

내가 오늘 처음 미국으로 공부하러 왔다고 하니까 명함을 주면서 자기 학교에 관심이 있으면 연락을 하란다.

아직도 흥분을 가라앉히자 못하는데 일본 여자가 나에게 뭐가 들어있냐고 묻는다.

그때서야 내가 돈이 많이 들어있다고 했던 것 같다.

30년 전에 그렇게 많은 현금을 지갑에 담아 다닌 것은 상상도 못 했을 거고 또 지갑을 주웠는데 체면에 열어보기가 그랬는지도 모른다.

만약에 열어 봤다면 그냥 줬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미국의 첫날은 여러 가지로 좋은 점만 봤었다.

일본 여자가 네 사람 저녁식사 값을 내주라고 한다

얼마냐니까 $50이란다. 두말도 안 하고 내주고 팁도 줬다.

방으로 돌아오니 배고픈 것은 다 잊어버리고 혼이 다 달아나 앉아있다가 미국의 첫새벽이 맞았다. 

새벽에 아침을 가져왔는데 커피 한주 전자하고 계란 햄 토스트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이라는 신문을 가져다줬는데

신문이 아니고 무슨 벽지를 한 보따리 가져다준 것처럼 페이지도 엄청 많고 뭉텅이로 몇 개가 묶여있는데 한국에서 두장짜리 신문을 보다가

이걸 보니까 보기도 전에 한숨부터 나왔다 이걸 어찌 다 보나 하고. 아침을 먹으면서 커피 한주전자를 다 마셨다.

신문도 정독은 안 했지만 대충 그림만 보고 넘겼는데도 아침 10시 정도가 된 것 같았다.

그날도  아저씨에게 전화를 해야지 하면서도 왜 안 했는지 모르겠다.

아침에 밖으로 나와 혹시 길을 잃을까 봐 큰길 모습을 눈에 담으면서 걷다 보니 

마켙스트릿이 나왔는데 그 길엔  극장이 많았다. 포스터를 보니까 남녀가 관계하는 내용이었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 하는 내용들이라 들어가 보고 싶었다. 극장 포스터를 보고 또 다음 극장이 궁금해 걷다 보니까

길이 끝나 들어가는 건 포기했다. 호텔로 돌아 갈길을 찾아서 돌아갔는데 며칠 후에 보니 그 근처에 아저씨가 사는 아파트가 있었다.

한국에서 부탁받은 물건을 전해주려고 전화를 했더니 저녁 7시쯤 오겠다고 했다 그래서 호텔에서 기다리는데

여자 두 분이 왔다. 고맙다면서 어젯밤 이야기를 듣더니 큰일 날 뻔했다며 자기 집으로 가잔다.

왜 돈을 그렇게 많이 주고 자냐는데 이미 3일 치를 줬다니까 하루치는 돌려받을 수 있다고 내 가방을 들고 나서니 

엉겁결에 따라나섰다. 로비에서 어제는 돈을 받으라고 사정하고 오늘은 돌려달라고 사정하고...

차를 타고 간 곳이 베이 브릿지를 건너 한시 간 이상을 간 것 같았다. Walnut Creek 인지 Concord인 것 같은데 지금은 기억이 안 난다.

그곳에서 이틀을 보내고 내가 내슈빌로 가야 하니까 공항까지 데려다준다고 해

가는 길에 아저씨 집에 잠깐 가면 안 되겠냐고 부탁을 하고아저씨께 전화를 했더니

아저씨는 삼일을 전화만 바라보고 계셨다고 왜 전화를 안했냐고 나무라신다.

나도 아저씨가 공항에 안 나오셔 무슨 사정이 있는가 하고 전화를 안 드렸다 했더니 공항에 가려고 했는데

무슨 비행기로 오는지를 몰라 못 갔다는 거다. 김포공항 생각하고 몇 시에 도착한다고만 편지에 썼으니

그 큰 공항에서 어떻게 나를 찾을 수가 있었을까 싶어 전화 못 드린 게 죄송했다.

아저씨를 만나지 10여 분 만에 빨리 가자고 해서 헤어지고 말았다.

나중에 내가 아저씨에게 전화를 먼저 안한 것도 너무 성급한 판단으로 스스로 고생길을 길게 한것 같았다.

미국에 와서 비슷한 사람, 또 아는 사람에게 이것저것 물어야 하는데 이미 미국 온 지 삼십 년이 다되고 생활 안정되고 

미국 사람처럼 사는 분들에게 무슨 정보, 이민정보를 들을 수 있었겠는가.

몇 달 뒤에 다시 샌프란시스코에서 와서 아저씨를 다시 만나보고 또 나에게 고맙게 해 준 분도 다시 만나보고 했더니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이삼일 그 댁에 머물면서 몇 사람을 만났는데도 전혀 나 같은 사람이 앞으로 미국에서 어떻게 살어야 하는지는 도움이 안 되고

다만 미국에 오래 살면 이렇게 살 수도 있구나 하는 것만 봤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우니까 집집마다 트리 장식하고 어느 집을 놀러 가는 데 따라갔더니 그 아주머니 남편은 미국 사람이었다.

남편하고 벽난로 앞에 앉아 이야기를 하는데 그때 느낌은 영화에서 봤던 미국집 같은 분위기였다.

다시 공항으로 가보니 정말 비행기 회사가 많았다. 내슈빌로 가는 비행기에 오르는데 불과 4일이었지만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기억나는 건 비행기를 타고 가는데 전부 담배를 피웠다.

마침 옆에 백인 아주머니가 앉았는데 담배를 꺼내 물길래 내가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줬다.

지금은 비행기에서 담배를 꺼내 물면 난리가 나겠지만 그때는 비행기 안이 뿌연 연기로 가득 찰 정도로 담배를 피웠다.

내슈빌에 도착하니 밤 8시쯤 됐는데 하늘에서 내려다본 내슈빌의 야경은 정말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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