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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여행기

1975-7-14 (1)

by 늘 편한 자리 2013. 10. 1.

 

 

오래전부터 꼭 해보고 싶었던 게 있었다.

어렸을 적 꿈이 무전여행이었다.

그것도 세계일주를 하는 게 꿈이었다.

김찬삼 씨의 세계 무전여행책을 얼마나 많이 보고 또 보고 했는지 나중엔 페이지를 외울 정도로 숙독을 했었다.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다 경험했듯이 외국에 나간다는 게 얼마나 어려웠고

외국에 다녀왔다면 다시 한번 볼 정도로 힘들게 빗장을 꼭꼭 닫아 버렸던 시대였다.

요즈음은 아침에 외국에 갔다 저녁엔 집에 돌아와서 자는 세상으로 바꿨으니

그 시절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상할지도 모른다.

20년 전에 중국 청도를 간 적이 있는데 골프장엔 전부 한국사람이 플레이를 하고 중국사람은 일하는 사람밖엔 안보였다.

그늘집은 없었고 식당에 갔더니 메뉴도 한국음식이 대부분이었다. 

청도만이 아니고 유럽엘 가도 그렇고 남미를 가도 그랬다.

미국에 와서도 느꼈던 게 사십 년 전 록키산맥 언저리를 운전하는데

아주 작은 동네에도 한국사람이 살았다. 정말 신기했다.

그런데 이젠 세계 어딜 가도 한국사람이 없는 곳은 없다.

우리가 아는 아프리카는 얼마나 오지였나,

학교에서 단체로 몬도가네라는 영화를 보러 가면 아프리카는 식인종이 드글대는곳으로 만 알았는데

그곳에서 사진 현상하는 분이 현금이 너무 많아 무장경호까지 두고 한다는 말을 듣고도 새삼스럽지가 않았다.

왜냐면 한국사람이니까 

그게 15여 년 전이었으니 지금은 더할까도 싶다.

그렇게 변한 세월에 다시 오래 전에 썼던 일기를 들고 기억을 더듬으면

나는 그래도 생각했던걸 썼다는 기분이 들겠지만 다른 사람이 본다면 얼마나 한심 내지는 답답할 건가도 생각해 봤다.

또 다른 면은 그때 그 시절을 한번 돌아본다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남에게 보여 주자고 쓰는 건 아니니까 생각나는 대로 써볼까 한다.

기행문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에 여행담을 오래전 일기 노트에 습작처럼 써놨었다. 

그렇지만 벌써 50년이 다 된 거라 기억이 다시 나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꼭 써 봐야 지하는 생각에 여러 번 시도는 했었는데 아직까지도 게으름이 먼저다.

 

그러니까 참 더운 여름날이었는데... 방학을 기다리고 조금씩 모았던 돈은 20,000원 남짓이고...

 돈을 만들려고 버스 안 타고 음악다방도 안 가고 학교 매점도 안 가고 거의 한 학기를 모은 돈이다.

요즘 같으면 알바 서너 시간이면 받을 수 있는 이만 원이지만

그때는 알바도 없고 짜장면 한 그릇에 40원, 50원 할 때니까 작은 돈은 아니었다.

다행히 집이 홍대 앞 연남동이라 학교는 걸어서 다녔고 홍대에서 청기와주유소를 지날 때까지 음악다방이 많았다.

친구들은 분식집으로 다방으로 몰려 들어가는데 나는 참았다.

부모님한테 손 벌리면 간단하게 얻을 수 있는 돈이었지만 나 스스로 모아서 가고 싶었다.

내 기억에 버스가 50원인가 60 원할 때였다, 학생은 허접한 종이로 만든 학생 표를 사면 더 싸다.

종로에 나가려면 지하철 일호선 공사를 한다고 차는 서대문 고가에서부터 꼼짝 안 하고

종로 삼가까지 가려면 한 시간 한 시간 반이 소요됐었다. 그땐 차가 없었다.

한쪽 모퉁이에 서서 손가락으로 세도 한참을 셀 수 있을 만큼 드물었는데 한 시간이 넘는다면 그때로서는 뉴스거리가 충분했다.  

그런 길을 걷기도 하면서 모은 게 이만 원이었다.

이걸 가지고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밤마다 지도를 놓고 이리저리 줄을 그어 봤다.

그때도 기차하고 고속버스가 웬만한 곳은 다 갔다 그렇기에 대충 잡아도 차비는 넉넉할 것 같았는데 잠은 어디서 자고 밥은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이리저리 줄을 긋고 지우고 하다 잠이 들곤 했다.

드디어 기말시험이 끝나고 시장에서 소고기를 조금 사다 장조림을 만들었다.

밑반찬으로 가져 갈려고... 남자가 그런 생각을 다하고 나중에도 그 생각을 하면 웃음이 나왔다.

물론 다 먹지도 못하고 며칠 지고 다니다 버렸다. 하얗게 백태가 끼니까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간장에 조린 거라도 그 더운 7월에 지고 다닌다는 게 우스운 일이었다.

그리곤 라면 몇 개 챙기고 옷은 한두 벌... 양말하고 내복한 두 개. 기억이 안 난다.

라면 끓이게 냄비 같은 건 가져간 것 같다. 무주구천동에서 라면을 끓여 먹었으니까.

허리에는 군용 벨트에 군용 수통을 차고 카메라는 이모집에서 빌려오고 배낭은 글쎄.... 준비가 다 돼서 떠나는데

골목까지 따라 나온 할머니가 어디가 노? 조심해라 하면서 다독거려 주신 것도 아스라이 기억이 난다.

 여동생도 따라 나왔던 것 같다.

그때가 1975년 7월 14일 오후 늦게였다. 야간열차를 타야 돈이 절약됐기에.

 

돌아보니 이제 것 살아있다는 것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고맙다고 해야 하나

정말 긴 세월을 징징거리면서 살아왔다.

세계일주는 못했지만 사는 곳은 그때와는 다르게 지구 반대쪽에 있으니 얼추 반당은 한 것 같다.

꿈꾸던 미국 생활이 생각했던 것 같지 않았고 가끔 나가본 외국도 별반 특이한 건 없었다.

한국에 사는 사람들 주로 학생들이 배낭여행을 다닌다는 걸 가끔 접한다.

너무 부럽다. 어떤 제재도 안 받고 자유스럽게 다닐 수 있다는 게 우리 세대에선 상 상초 차도 안 됐다.

앞으로 쓰는 글에도 자주 언급하겠지만 그땐 통행금지라는 게 있었다.

참 얼마나 답답한 세월을 살았는지 지금의 젊은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할 거다.

일 년에 한 번 크리스마스이브엔 어떡하든 집에 안 들어 갈려고 돌아다녔던 기억이 많다.

고삼 때인 것 같다.

명동에 있는 심지다방이란 곳에서 친구들하고 밤늦게까지 통금해제를 즐기고 있었는데 12시가 넘어 버스가 끊어졌다.

명동에서 종로로 나와 신촌으로 가는 버스를 타는데 버스는 끊기고 택시 탈돈은 없고 걸어서 서대문 아현동 이대 신촌로터리를 지나

청기와주유소 뒤 성산동에 있는 집까지 오니 새벽 세시였다.

그래도 기분이 좋았던 것 같다 평소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을 한 거니까.

그런 통금이 없는 날을 제외하면 잠이 안 와도 12시면 누워 자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들을 것도 볼 것도 12시면 땡이니까.

지금 쓰는 건 그냥 서두, 시작해 보려는 서두이다. 또 지나고 보면 이젠 영영 기억에서 사라져 버릴 것 같다. 다행히 그때는 일기를 쓰던 착한 아이여서 아직 것 그 일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걸 그냥 베끼기엔 너무 거시기하다. 살이 붙어질지는 몰라도 그냥 한번 꺼내보겠다.

시작을 하면 곧장 가볼 작정이다.

쓰다가 다른 생각이 떠오르면 다시 돌아와 살을 붙이고....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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