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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Handel의 수상음악,

by 늘 편한 자리 2011. 1. 6.

 

 




수상음악은 헨델(1685~1759) 이 작곡한 관현악을 위한 모음곡인데, 1717년 6월 17일에 당시의 국왕 죠지 1세의 왕실의 템즈 강 위에서 파티의 흥을 돋구는 음악으로 연주되었으며, 그 후에도 같은 기회에 중복하여 사용된 작품이다. 전곡은 각각 장대한 프랑스 서곡의 시작, 몇개의 기지에 찬 춤곡이 나열된 두 개의 모음곡(F장조 및 D/G장조의 모음곡)
 헨델은 젊어서 이탈리아에서 명성을 얻은 뒤 유럽대륙과 영국을 왕래하면서 활약했고 결국은 영궁에 귀화하여 그곳에 뼈를 묻은 국제인이었다.
그가 25세였던 1710년에 독일 하노버 선거후의 궁정악장이 되었는데, 휴가를 얻어 당시 오페라가 성행하던 영국으로 건너갔다. 헤델은 그곳에서 대환영을 받았고, 휴기기간이 만료되어 일단 독일로 귀국했다가 2년 후에 다시 휴가를 얻어 재차 영국 땅을 밟았다.  그때부터 헨델은 인기가 상승하였고 결국 영국 왕실로부터 신임을 받아 앤 여왕에게서 200파운드의 연금을 받기도 했다. 결국 하노버보다 런던쪽이 훨씬 좋아진 헨델은 하노버 선거후에게는 아무런 양해도 없이 앤 여왕의 왕실 작곡가로 정착하였다. 그러나 1714년, 앤 여왕이 별세하자 왕위를 게승할 왕자가 없었으므로 공교롭게도 하노버 선거후 게오르크가 영국의 왕으로 초빙되어 조지 1세가 되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허락도 없이 떠난 헨델을 못마땅하게 여긴 조지 1세는 헨델의 지위를 그대로 놔둘리 없었다. 난처해진 헨델을 돕기 위해 그의 친구인 카르만제케 남작과 바린톤 백작이 묘안을 생각해 냈다. 1715년(1717년이라는 설도 있음) 여름철에 왕이 탬즈강에서 뱃놀이를 할 때를 이용해 멀리서 왕의 배를 뒤따라가며 50여명의 악사들이 은은하게 음악을 연주하여 흥을 돋구어 주었다. 국왕은 곧 아름다운 음악에 깊이 감동하였고 이로 인하여 헨델과 국왕의 사이가 다시 가까워지게 되어 왕실의 작곡가로 계속 남게 되었다는 일화이다.
이리하여 이 곡은 <수상음악(물위의 음악)>이라고 불리워지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결코 <물> 그 자체를 묘사한 것은 아니요, 또 이 음악을 들었다고 해서 서늘한 느낌이 드는 것도 아니다. 이 곡은 당시에 성행했던 춤곡을 모아서 엮은 것으로 이탈리아풍의 합주 협주곡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전부 22곡으로 이루어진 모음곡 형식의 커다란 세레나데이다.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과 더불어 헨델의 유명한 야외음악으로 손꼽힌다.
전곡의 연주에는 1시간 이상 걸리는데 프리디리히 클리잔더가 편곡한 20곡의 것과 레트리히가 편곡한 22곡이 있다. 그것이 다시 <제1 모음곡>, <제2 모음곡>, <제3 모음곡>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러나 현재에는 영국의 명지휘자인 헤밀턴 하티경이 편곡한 6곡의 것이 많이 연주되고 있다. 또한 연주자에 따라 연주 순서를 조금씩 바꾸기도 하고 악기 편성을 다르게 하기도 하며,  템포를 무척 다르게 연주하기도 한다.

 

헨델 : 모음곡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
Georg Friederich Handel : Music for the Royal Firewor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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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델이 64세 때인 1749년에 작곡했으며「수상음악 Water Music」과 함께 그의 만년을 장식하는 대표적인 관현악곡이다. 1749년 4월 27일, 런던의 그린 파크에서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체결된 평화조약을 축하하기 위해 대규모의 불꽃놀이 축제가 열렸다. 헨델은 이때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어「왕궁의 불꽃놀이 음악」을 작곡 연주했다.

이야기는 8년 전인 1740년 오스트리아의 황제 칼 6세의 서거(逝去) 무렵으로 돌아간다. 칼 6세에게는 아들이 없어 국본칙령(國本勅令=기본법을 이루는 조칙, pragmatic sanction)으로 가헌(家憲)을 정해 공주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중부 유럽, 벨기에, 이탈리아를 포함한 광대한 영토을 전부 상속시키도록 했다. 그러나 칼 6세가 죽자 상속권 싸움이 일어났다.

바바리아의 선제후(選帝侯)였던 칼알브레히트가 프랑스, 스페인, 프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오스트리아로 침공하여 빈의 마리아 테리지아를 내쫓고 1742년에 황제 자리에 올랐다.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의 시작이었다. 쫓겨난 마리아 테레지아는 친척인 헝가리의 도움을 얻어 바바리아, 프랑스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고국을 돌아왔다. 프러시아 왕 후페데리크와 평화조약을 맺었다. 한편 영국을 자기 편으로 끌어 들여 우위를 되찾았다. 그러한 영국과의 관계에 불만을 품은 프러시아가 얼마후 평화조약을 깨뜨리고 보헤미아로 쳐들어왔다. 마침 바바리아의 칼 알브레히트가 죽어서 오스트리아와 다시 협상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오스트리아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을 황제로 선임하여 모든 일을 일단락된 듯 했다.

그렇지만 마리아 테리지아 편을 들은 영국과 오스트리아에 적대했던 프랑스의 갈등이 마리아 테레지아의 상속을 구실 삼아 또 전쟁으로 표출되었다 전쟁은 8년이나 계속된 뒤에 간신히 끝났다. 비로소 두 나라는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1748년 7월 7일 에스 라 샤펠(아헨)에서 평화조약을 맺고 관계국은 모두 점령한 땅을 돌려 주었다.

이듬해 봄, 영국은 긴 전쟁에서 해방된 기쁨을 축하하기 위해 불꽃놀이를 계획했다. 불꽃은 카발리에레 세르반도니가, 음악은 헨델이 각기 담당했다. 헨델은 군악용 악기를 쓰라는 영국 황제 죠지 2세의 요구에 맞추어 트럼페트 9개, 호른 9개, 오보에 24개, 화고트 12개, 콘트라화고트 1개, 팀파니 3상, 작은 북 2개, 여기에 세르팡 sepent이라는 아직 영국에서는 낯선 저음악기까지 덧붙여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57인의 대합주 편성으로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을 만들었다. 더구나 초연에는 관악기를 늘려 100개 이상이나 사용했다고 한다. 불꽃놀이를 열기 1주일 전인 4월 21일 보크스 홀 가든에서 공개 연습을 할 때 1만 2천명의 군중이 모여들어 법석을 떨었다.

축제 당일은「왕국의 불꽃놀이 음악」의 서곡을 연주하고 101발의 캐논포가 울려퍼진 뒤, 불꽃이 올라가야 할 차례가 되었으나 모처럼 아름다운 거대한 성당 모양을 하늘에 그리려던 시도는 무산(霧散)되고 오히려 불꽃이 딴 곳으로 튀어 근처 건물을 태우는 소동만 일으켰다. 그리고 불꽃을 담당한 세르반도니는 울확 치민 나머지 칼을 뽑아들고 축제 집행관에게 덤벼들어 상처를 입히기까지 했다. 결국 사람들의 관심은「왕궁의 불꽃놀이 음악」으로 몰려 예기한 대로의 성공을 거두었다. 이미 64세였던 헨델은 3년 뒤인 1752년에는 장님이 되어 더 이상 작곡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있다가 1759년에 죽었으므로,「왕궁의 불꽃놀이 음악」은 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화려한 무대였다. 축제를 치룬 후 헨델은 현악기를 보강하여 연주회용 관현악곡으로 고쳐 썼다. 그해 5월에 런던의 자선 음악회 때 이 개정판을 처음 공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