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중에 삼촌에서 작은아버지가 못 되고 떠나신 분이 있다.
아주 오래전 우리만 그런 게 아니고 그렇게 떠난 식구들이 많이 있었을 거다.
그중 한 분은 오랫동안 병치례를 하시다 결혼도 못하고 30세에 가셨다.
아버지 형제는 여섯 분이었는데 한분은 14세에 무슨 돌림병으로 돌아가셨는데
아버지 동생인지 형인지 들었는데 이젠 모르겠다.
동생이라는 것 같은데 이제 모두 다 고인이라 대충 생각한다.
이 삼촌은 서울 법대를 들어가 할머니가 우리 아들 판검사 된다고 좋아하셨다는데
그 좋다는 대학을 이년 밖에 못 다니고 폐결핵으로 고향으로 내려와 몇 년을 병 치례 하다 가셨다.
결핵이라고 집에도 못 있고 여관에 방을 얻어 거기서 숙식을 했다.
지금 같으면 약이 좋아 힘들지 않았을 건데 그 시절은 어쩔 수가 없어 집에도 못 계셨던 같다.
그 시절 집들이 다 그만해서 방 하나를 온전히 차지하기엔 집들이 다 적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어릴 적엔 여유 방이 있어도 다 모여 잤다. 연탄 아끼고 전기 아끼고.
하루는 삼촌이 자살을 기도 했다. 목에 칼을 꽂았는데 다행히 큰 아버지가 발견해 살아났다.
그런 일이 있고는 삼촌이 무섭게 생각 들었다. 나중에 돌아가셨는데 장례도 제대로 안 했던 것 같다.
내 기억에 장례를 보지 못했다. 병원에서 의사가 폐를 봤더니 다 녹고 없었다는 말을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는데 정말인지는 모르겠다.
가끔 놀러 가면 반가워해 주고 기억엔 많이 마르고 항상 이불속에 누워 있었다.
기타를 잘 치셨는데 노래를 불러주고 나에게 키타도 가르쳐줬다.
나중에 그 키타를 나에게 유산으로 주셨다.
이태리제였는데 우리 형이 화난다고 그 키타로 내 머리 쳐서 머리가 기타를 뚫고 나왔다.
그 시절 코미디에서 그런 걸 많이 했는데 딱 그 짝이 났다.
삼촌이 돌아가시고 할머니는 희망이 없어졌다.
왜 이름을 원보로 지었는지 느낌이 별로다. 천보, 대보, 원보.
큰아버지도 천보라 천 까지 였고 원보는 한참 못 미친것 같다.
그래도 대보인 우리 아버지는 조금 더 사시고 굴곡도 그만 그만 했는데
갑자기 돌아가시는 걸 보면 역시 거기까지였던 것 같다.
그 많았다는 재산 천보가 땅 때기 한 조각 없이 다 없애고 그 밑 동생들은 이름대로 사셨던 것 같다.
자식을 키워보니 옆에 있는 자식이 제일인 것 같다.
아들은 장가가면 처가로 가고 딸은 시집가면 사위를 데려 온다는데
우린 딸이 없다.
아들한테 장가가라고 하면서도 가버리면 우린 어떡하나? 걱정이다.
마흔이 다 된 아들이 밉지가 않다.
아침에 출근하고 돌아와 저녁밥상에 만나는 게 좋다.
답답한 마음에 아비가 아가씨를 찾아 줘도 서두르지를 않는 걸 보니까
세상이 변하긴 변한 것 같다.
만약 우리 아버지가 나에게 아가씨를 찾아 줬다면 나는 그 집 문 앞에서 안 움직일 건데.ㅋㅋㅋ
요즘 아가씨가 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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